‘스페어’ 해리의 결혼을 보며 콘수엘로를 떠올렸다. 해리의 상대 역시 미국 여성이어서다. 널리 알려졌듯 이혼한 적이 있는 할리우드 조연배우 출신의 혼혈 메건 마클로, 왕실 계정에 ‘여성이자 페미니스트임이 자랑스럽다’고 적을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현대 여성이다. 콘수엘로가 공작가를 살렸듯 메건 역시 영국 왕실에 기여했다는 느낌 또한 받는다. 콘수엘로와 달리 메건은 상대적으로 간접적인 방식(평판도)이었지만 말이다.
사실 다이애나비가 숨진 20여 년 전만 해도 영국 왕실은 비루했다.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비난이 거셌다. 엘리자베스 2세 자신도 “냉담하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하지만 그 사이 크게 달라졌다. 왕실 인사들은 “왕실도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덕분”이라고 말한다. ‘왕실=전통의 보루’처럼 돼 있지만 시대상의 흐름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는 영국 군주제의 오랜 특징이기도 하다. 근대 유럽 강국의 왕조들이 무너질 때 영국 군주들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권력을 내려놓고 권위를 택했다. 영국인의 정서적 구심이 되기로 한 것이다. 그 덕분에 별 진통 없이 입헌군주제란 지극히 영국적인 제도가 태어났다. 프랑스의 지성 앙드레 모루아가 “프랑스엔 굉장히 변한 것 같아도 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영국은 이와 정반대로 ‘변화하는 것 같지 않아도 변화했다’고 해야 마땅할 것” (『영국사』)이라고 말한 이유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의식, 가발과 황금마차, 동화에 나오는 공주, 이러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전통 속에서도 신속한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메건의 왕실 입성도 그런 사례의 하나일 게다. 수십 년 전 왕실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어서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왕실도 이런 노력을 한다. ‘해리가 메건을 만났을 때’가 주는 또 다른 메시지다.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