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시론] 몰카사건은 여성들의 누적된 박탈감을 건드렸다

중앙일보

입력 2018.05.23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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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의 변호사

“동일범죄 동일처벌”, “남자만 국민이냐 여자도 국민이다”.
 
지난 19일 서울 대학로에선 여성 1만2000명이 참여한 ‘불법 촬영 편파수사 규탄 집회’가 열렸다. 단일 성별 최대 규모 시위였다. 법이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는 이런 불만의 목소리는 몰래카메라 사건에서 시작됐다. 홍익대 누드크로키 수업에서 여성 모델이 남성 모델을 촬영해 사진을 사이트에 올린 사건이다. 여성 피의자가 사건 발생 일주일여 만에 검거·구속되자 피해자가 남성이라 강경한 수사가 이뤄졌다는 ‘편파수사’ 여론이 들끓었다.

대학로에 모인 1만여명의 여성들
남성 모델 몰카사건 처리에 항의
피의자 97% 남성인데 구속 적어
검찰·법원 등이 제대로 처벌해야

사실 이번 몰래카메라 사건의 신속한 처리는 피해자가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됐기 때문이다. 피의자 구속 역시 온라인상 유포라는 죄질의 위중함과 증거인멸의 정황에 바탕을 둔 것이다. 청와대 청원에 서명하고 직접 집회에 나선 여성들도 그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성들이 차별을 외치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답하지 않고 방치해온 절박함과 상대적 박탈감이 누적됐기 때문이다.
 
그간 대부분의 몰래카메라 사건 피해자는 여성이었다. 2017년 몰래카메라 피의자는 5437명이었는데 남성이 5271명(96.9%)이었다. 2016년에는 전체 피의자 4491명 중 4374명이 남성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30%가 조금 넘는 사건들만 기소됐다. 피의자가 구속된 경우는 2016년 135명, 2017년 119명이었다. 해마다 몰래카메라 관련 사건은 급증하지만, 기소조차 쉽지 않고, 구속된 숫자는 오히려 줄었다. 구속률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몰래카메라 범죄에 대한 처벌의 강도가 약했다는 방증이다.
 
여성들이 몰래카메라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나 실제 피해의 정도와, 한국사회가 이를 처리해온 결과 사이에는 괴리가 크다. 여기에는 우선 검찰과 법원의 책임이 크다. 피해자가 몰래카메라 피해를 호소해도 이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은 미온적이다. 법원도 피의자가 고의로 몰래카메라 영상을 온라인에 적극적으로 유포한 게 아니라면 중하게 처벌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경찰이 단독으로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란 쉽지 않다.


시론 5/23

성폭력 피해자를 법적으로 지원하다 보면 피해자의 변호인까지 고발하는 가해자들을 만난다. SNS에 피해자는 물론 변호인까지 비방하고 모욕하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2차 피해를 막도록 고소 시점부터라도 가해자가 비방 글을 올리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해도 소용없다. 한 수사관은 “나중에 검사가 구속하면 모를까, (상대의) 손가락을 부러뜨릴 수도 없잖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의 사법 체계를 돌아보면 그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다.
 
은밀한 신체 부위나 성관계 장면이 담긴 촬영물이 온라인에 돌아다니거나 돌아다닐 수도 있는 상황에 부닥친 당사자들의 고통과 불안은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피해가 일파만파 커질 때까지 도움받을 길이 없다. 실제 피해가 발생해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을 받을지 막막하니, 피해자이거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불안과 분노는 클 수밖에 없다.
 
최근 사진모델 일을 하다가 각종 성폭력과 원하지 않는 촬영을 당하고 심지어 그 촬영물이 유포된 피해를 본 여성들의 고백이 이어졌다. 가해자로 지목된 측에서는 계약서와 촬영횟수 등을 내세우며 합의된 촬영이었고 유포는 모르는 일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계약서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가해자의 권리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절대적 ‘을’의 지위에서 서명했을 피해자의 입장이 충분히 참작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수사가 본격화하면 피해 영상이 거꾸로 피해자들이 당시 동의해 촬영했다는 증거라며 제출될 것이 뻔하다. 수치스러운 촬영을 요구받았던 피해자들은 이제 그 촬영물이 수사기관으로, 법정으로 피해를 부정하는 증거로까지 제출되고 사용되는 것을 목격해야 한다.
 
게다가 촬영물이 앞으로 더 널리 유포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 촬영물이 유통되지 않도록 할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을 범죄로 의율(擬律)할 수 있는 법규조차 요원하다. 이런 문제에 한국 사회는 그동안 너무 무심하게 대해왔다.
 
관련 법규 재정비가 시급하다. 그에 못지않게 검경이 이미 가진 수사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죄질에 맞게 법을 적용하는 일도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법을 만들고 처벌의 상한선을 강하게 정해도 적용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제도 만큼 의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은의 변호사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