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2)
아침 일찍 대문을 열고 나가니 구순이 훨씬 넘은 동네 어르신이 운동 삼아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있다.
“식사하셨어요? 일찍 운동 나오셨네요” 하니 “에구, 왜 안 죽는지 모르겠네. 남들 보기 미안타”라며 쑥스러워한다. 만날 때마다 반복하는 레퍼토리라 아예 얼굴을 마주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내가 더 송구스럽다.
70대는 어르신 축에 못 들어
우리 동네를 지나 고개 하나 넘어가면 나이 드신 어른이 많이 사는 동네가 있다. 거기엔 도로에도 ‘노인 보호구역’이라는 글이 큼지막하게 쓰여있고 또 걸림 턱이 세 개나 있어 차가 빨리 달리지 못한다. 차를 모는 젊은 사람은 그 길을 지날 때마다 투덜거린다. 나는 그 길이 답답하지 않고 괜찮은 걸 보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가 보다.
며칠 전 그쪽으로 갈 일이 있었다. 동네에 들어가 구순 어르신이 사는 두 집을 방문했다. 몇 년 전 내가 돌봄 일을 했던 분들이라 그쪽을 지나갈 때면 들러보게 된다. 한집은 몇 년 동안 누워만 있는 와상환자다. 아직 별 진전도, 차도도 없이 그냥 그대로 누워 있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머리를 늘 단발로 단정하게 하고 있던 분인데, 그날은 이발을 했다.
“에헤이, 어무이 머리를 누가 이래 이발을 해놨을까잉~ 처녀 같은 인물 다 베맀다. 호호” 하고 농담했더니 그 말을 하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뜨린다. 당신 머리를 자른 뒤 거울을 볼 때마다 너무너무 속이 상했단다. 아무도 아는 척 안 해줘 머리를 잘못 잘랐다고 말하니 자식은 오히려 화를 내더라는 것이다. 당신 마음을 무시했다고 서러워했다. 치매가 아닌 이상 살아있는 동안은 모두 정상인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나도 자식이면 화를 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목욕할 때 머리를 감고 손질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드니 짧게 잘라야 하는 건 맞지만 어르신이 자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기다려줘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저런 대화를 하니 마음이 풀려 오히려 머리를 짧게 잘라서 좋다고 한다.
두 번째 방문한 댁은 100세가 거의 돼 가는 어르신이다. 허리가 안 좋아 거의 기어 다니다시피 한다. 나를 보자마자 “왜 안 죽노? 사는 기 지겹 데이” 하면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 내어오며 이런 ‘귀신’을 찾아와주니 정말 고맙다고 손을 잡는다.
누군가는 그만하면 죽어도 될 만큼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나 또한 그 나이가 되어 봐야 알 일이다. 하지만 죽음만큼 두려운 것이 또 있겠는가. 나이 든 분한테는 죽음보다 더 힘든 것이 아픔일 것이다. 그 어르신은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어도 안 죽으니까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다.
간 김에 머리 염색을 해준다고 하니 까만색 말고 조금 연한 색으로 해달란다. 그게 더 멋스럽게 보인단다. “어무이, 영감 생깃제? 아무래도 수상햐” 하니 “영감이라도 생겨 놀아보고 죽으면 한이나 없겠네” 하며 농담을 한다.
100세 다 된 할머니의 충고
"이보게, 내가 나이 들어보니 아웅다웅 억척같이 사는 게 다 부질없는 거야. 일 많이 해 몸 상하지 말고 먹고 살 만큼만 적당하게 하게. 젊을 때 좋은 음식 찾아먹고 세상 풍경 많이 보고 다니게. 이 빠지고 다리 아프면 다 무용지물이야. 연애도 사랑도 많이 해보게. 그리고 머리가 되거든 공부도 많이 하게.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도 뭐 하나 ‘이거다’ 하고 해 본 게 없으니 너무 허무해. 돈도 내가 써야 내 돈이지 돈 벌어서 모아놓고 써보지도 못하고 내 돈은 지금 요양보호사가 다 쓰고 돌아다닌다네”라고 말한다.
요양보호사를 심부름 보내며 하는 말씀이다. “자식 만들어 놓은 거? 그건 기본 아닌가?”라고 덧붙인다. 뵐 때마다 이 말을 하신다.
외출했다가 들어와 대문을 닫으려니 아침에 만난 어르신이 또 동네 한 바퀴 돌고 있다. 모시고 돌담에 앉아 사과 주스 한잔 대접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무이요, 나이 든 것이 부끄러운 게 아니고요. 몸 관리 못 하고 누워 계시면 그땐 부끄러운기라요. 나이 들어서는 발바닥이랑 땅바닥이랑 딱 붙어서 사뿐사뿐 어무이 같이 서서 걸어 다니시기만 해도 멋지게 사는 기라요. 다른 욕심은 버리시고 오전 오후 힘 날 때마다 동네 한 바퀴 도시소. 이제까지 살았는데 100세까지 사셔서 대통령 선물도 받아보고 가셔야지요. 꼭 운동하쇼”라고 하니 소녀같이 입을 가리며 “호호” 웃는다.
하! 그러는 나도 정말이지 운동을 좀 해야 하는데…. 부른 배를 끌어안고 사돈 남 말 하고 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