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13)
어머니는 나만을 위해 사신 것 같다. 내 집에서 외손녀들을 키우며 노년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이모가 들려준 어머니의 결혼 전후 구구절절한 이야기다. 외할아버지(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는지 외할아버지를 뵌 기억은 없다)가 일본사람에게 넓은 갈밭을 담보로 많은 돈을 빌렸다. 변제 기한이 돼도 돈을 갚지 못하자 혼사 이야기 중인 우리 할아버지와 의논한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담보물 반환 놓고 틀어진 친정과 시집
그때는 혼사가 결정되면 친정과 시집에서 두 번의 식을 올렸다는데 어머니는 친정에서만 식을 올리고 그냥 준비도 없이 시집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렇게 서럽게 죄 없는 죄인으로 시집을 왔는데 꼭 둬야 할 아들도 못 낳고 딸 하나만 낳았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그때는 아들 중심의 가족제도였다. 어머니는 항상 돈이 더럽다고 했다.
어머니는 조그만 키에 영리하고 착해 할아버지도 예뻐했고 아버지도 좋아한 것 같다. 부모님은 크게 싸우는 일도 없었다. 간혹 언성을 높이며 다투실 때 아버지는 베개를 들고 방바닥을 두드리며 화를 잠재웠다. 어머니를 때리는 법은 없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께 많은 재산을 남겼다. 그 유산에 외할아버지의 재산도 있었지만, 아버지에겐 자식이 나밖에 없었으니 항상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나도 아들을 못 낳아 그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외할아버지의 한도 풀어주지 못했다.
내가 시집가서 둘째 아이를 가질 때까지 아버지는 작은집을 두지 않았다. 내가 둘째를 낳고 얼마 후에 아버지가 어머니께 “아들을 두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 모르게 주위의 권유로 나보다 두 살 어린 첩을 얻었단다. 그 아들을 어머니의 호적에 올렸지만 아이 어머니가 아이를 주지 않아 키울 수 없었다.
아버지는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아들 셋을 두었다. 작은집의 아들 셋은 모두 호적에 올려서 어머니의 아들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과 작은집에서 살았다.
'작은집'이 아버지 재산 몰래 처분
나는 당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살고 있어 이런 상황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그 일을 알고 재판을 하려는데 남편이 말렸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우리가 잘살고 있으니 그만두라고 만류했다. 나도 그 아이들이 내 동생이라 가슴에 상처를 줄 수 없어 소송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져간 그 많은 재산을 그들이 어떻게 탕진했기에 지금은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겨우 산다고 한다. 큰아들은 2년 전에 죽고 둘째도 일본에서 행방불명됐다고 했다. 아들이 도대체 뭐길래…. 아버지가 저승에서 후회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다. 외할아버지의 한이 아니었을까.
욕심 없고 참을성 많았던 어머니
험한 입담을 가진 의과대학 친구의 입에서도 어머니만은 양반집 규수라는 칭찬이 나왔다고 한다. 내 딸 넷을 어머니가 키우셨고 증손자, 증손녀도 돌봐주셨다. 그 덕분에 내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은 잘 자라 훌륭한 인재가 됐다. 내가 병원 일이 바빠 잘 돌볼 시간도 없었는데 이렇게 자랑스럽게 큰 것은 어머니 은덕일 것이다.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heesunp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