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전영기의 퍼스펙티브] 북한의 심장을 한국형 원전이 뛰게 할 때 진짜 평화 온다

중앙일보

입력 2018.05.10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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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선언보다 귀한 ‘한반도 평화에너지’ 
에너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산업기술과 정신문명이 아무리 진보해도 질 좋은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국가는 존속할 수 없다. 지구 위의 나라들이 석탄·석유, 가스(고갈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마다치 않고 원자력, 태양광·풍력(영구 연료)의 기술 발전에 사활을 거는 이유가 무엇인가. 에너지의 관리가 국가의 생존·유지에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인체에 비유하면 에너지는 심장과 같다. 정치의 기본 임무 중 하나는 나라의 심장, 즉 에너지원을 발굴하고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두뇌가 심장을 지키는 꾀를 내고 심장이 두뇌에 피를 공급하는 이치가 마치 정치와 에너지의 관계와 비슷하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의 44분간 도보다리 무성(無聲) 대화에서 최초로 유일하게 포착된 단어는 “발전소 문제…”라는 다섯 글자였다. 비밀 대화에서 ‘완전한 비핵화’ 이후 북한의 전력 공급 문제가 의제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중앙일보 5월 1일자). 이는 김정은의 3대에 걸친 핵무기 집념이 단순히 안보체제 보장에만 꽂혀 있는 게 아님을 시사한다. 일본 언론의 “북한 당국이 한국이 짓다가 중단된 함경남도 신포 경수로의 건설 재개 가능성과 필요한 물자 목록을 점검·조사하고 있다”(아사히신문 5월 6일자)는 보도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에너지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
“정은아 정은아 새집 줄게 헌집 다오”
핵무기 제거한 자리에 원전 세워야
중국 원전 파고들지 못하게 경계를

인프라+에너지 지원은 한국 주도로
문재인·김정은이 나눈 ‘발전소 문제’
김정은 “미국이 원전 건설 허용할까”
미 국무부 “모든 가능성 열려 있어”

노무현·김정일 ‘평화원전’ 의기투합
양질의 전기 공급, 한국 원전만 가능
짓다 만 신포 경수로 “역사의 축복”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노무현 대통령 시절 북핵 문제에 관여했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고 중국이나 베트남을 능가하는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해 북한을 경제부국으로 이끌려 하는 것 같다”(5월 3일 국회 세미나)고 분석한다. 아버지 김정일이 추진한 ‘핵무기 개발’의 목표가 미국으로부터 체제 방어였다면 아들 김정은이 선언한 ‘핵무기 완성’은 체제 보장+경제 성장을 패키지로 추구한다. 마치 김정은이 완성된 핵무기를 내어 주는 대가로 미국과 한국·일본을 향해 “인민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사회주의적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2012년 4월 15일 열병식 연설)는 자신의 꿈을 실현해 달라고 호소하는 듯하다.


김정은이 인민에게 배고픔을 면하고 부귀영화의 은혜를 입히려면 당장 입에 풀칠해 줄 식량 원조와 별도로 철도·도로·항만·가스관·공단 건설 등 각종 인프라 공사에 착수해야 한다. 동시에 나라의 심장이자 산업 중의 산업인 전기와 에너지원을 대량·양질로 지원받아야 한다. 식량+인프라+에너지를 공급받기 위해 김정은이 내놔야 할 현물은 감춘 핵무기다.
 
‘한국형 원자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병령(71·전 한국원자력연구원 본부장) 박사는 “남북 간 핵 문제 타결의 요점은 북한이 원자력 무기를 내려놓고 한국이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무기를 녹여 쟁기를 만든다는 말이 한반도 평화 만들기의 공식”이라는 것이다. “파괴적 핵은 버리고 평화적 원전은 짓자”는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어릴 때 모래 장난을 하면서 친구들과 부르던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이 노래를 한반도 평화 게임에선 “정은아, 정은아 새집(원자력 발전소) 줄게, 헌 집(핵무기) 다오”로 바꿔 부르면 되겠다 싶었다.
 
김정은 일가에게 ‘파괴적 핵무기’와 ‘평화적 원전’을 상호 대체 개념으로 보는 사고방식은 낯설지 않다. 일례로 김정일은 2007년 10월 3일 노무현 대통령과 평양 회담을 할 때 김계관 6자회담 대표의 입을 빌려 핵무기 개발뿐 아니라 원자력 발전까지 거부하는 미국을 격렬히 성토했다. 두 정상 앞에 불려 나온 김계관은 “미국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한테 적대시 정책을 안 한다고 해놓고 다시 하는 게 첫 번째요, 우리는 전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미국은 북반부의 비핵화, 우리한테만 핵무기를 뺏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게 두 번째다. 세 번째는 우리는 평화적 핵 활동(원전)은 해야겠다는 거고 미국은 핵이라고 붙은 것은 다 안된다는 것”이라고 불평했다.
 
이로부터 11년이 흐른 요즘, 김정은의 환경은 아버지 때보다 좋아졌다. 특히 세 번째 원전 문제와 관련, 필자는 지난주 미국 워싱턴DC의 국무부를 방문했을 때 대북 의사 결정 라인에 있는 핵심 관계자에게 물었다.
 
▶ 필자=“김정은도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전기와 평화적 원전을 요구할 텐데 미국 정부는 여전히 부정적인가?”
 
▶ 국무부 관계자=“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2007년 상황과 비교하면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평화적 원전을 짓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필자는 국무부의 이 답변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김정은에게 전해주고 싶다. “대규모의 질 좋은 전력을 얻기 위한 평화적 원전 건설을 미국이 얼마든지 보장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러니 파괴적인 핵무기 체제를 영원히, 검증 가능하게, 되돌릴 수 없게 폐기(PVID)하라.”
 
다시 2007년 노무현·김정일의 대화록으로 돌아가 보자. 노 대통령은 한국형 원전을 북한에 짓고 싶다는 의지를 집요하게 피력했다. “우리의 경수로 원전은 중수로와 비교하면 사용후 발생하는 핵물질의 양이 미미하다. 핵 재처리 과정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감시할 수 있는 기술 및 관리 체계가 확보돼 있다.” 노 대통령이 한국형 원전이 북한 경제에 가져다줄 놀랄만한 변화상을 반복해서 설파하자 김정일의 마음이 흔들렸다. 군부의 반발 때문에 난색을 보이던 해주 개방까지 검토하겠다고 했다. 해주는 노 대통령이 개성에 이어 제2의 남북경제협력특구 후보로 점찍은 곳이다.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도 1994년 6월 미·북을 중재하기 위해 평양에 들어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우리한테 러시아형 경수로 원전(뒤에 한·미·일 협상 과정에서 미국형을 거쳐 한국형으로 두 차례 바뀜)을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 정부와 야당 정치인이던 노무현·이철·유인태 등이 국내 여론을 결집하고 미국 정부를 설득해 북한 신포에 한국형 경수로를 짓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냈다.
 
1990년대 이래 남북한과 미국의 지도자들은 오직 원전만이 북한 경제의 질적 변화를 끌어낼 전력원으로 여겼다. 대화록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안전성, 중국이 배우고 싶어하는 최고 수준의 기술성, 가격의 저렴성, 한국이 독자 개발한 고유성, 북한 전역으로의 확대성 등이 한국형 원전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김정일 역시 북한의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도움받을 전력원으로 원자력 하나만 적시했다.
 
일각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소를 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안에서나 통하는 탈원전 풍조에 편승해 우물 안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같다고 밖에 달리 평할 말이 없다. 인간의 기술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안전하고, 미세먼지 하나 없는 가장 친환경적인 데다 가장 싼 가격으로 24시간 내내 균질적이며 지속해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발전소가 원전이다.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은 북한 땅에서 그냥 소비되고 마는 일회성 장치이지만 원전은 인력과 정보, 기관 간 협조가 끊임없이 이뤄지는 남북 생태 교류형 에너지다.
 
이런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우리보다 20년 늦게 자국형 원전을 개발해 압도적인 금융 무기로 세계 수출시장에서 우리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이라는 존재다. 김정은이 미국의 압박으로 핵을 폐기한다 해도 에너지 보상만은 중국형 원전을 받기로 한다고 가정해 보자(중국은 비용을 많이 지불하더라도 한·미·북 3자 구도에 대등하게 끼어들려고 애쓰고 있다. 8일 중국 다롄에서 갑자기 열린 북·중 정상회담도 중국의 초조함이 반영된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이럴 경우 ‘핵 폐기 이후’ 동아시아 지경학(地經學)은 불확실성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것이다. 한국 정부는 핵 폐기 과정에서 미·북을 연결하는 기적 같은 드라마를 연출해 놓고도 핵 폐기 이후 경제적 주도권을 중국에 빼앗기는 셈이다.
 
원전은 핵무기 제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도화된 복합적인 기술이 요구된다. 핵무기가 라디오라면 원전은 컬러 TV에 비유된다. 핵무기와 달리 원전 제작·건설은 반드시 선진 기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완공된 후에도 유지·보수, 사용후 핵연료 처리 등 문제에서 수입국은 수출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경험적으로 원전의 수출입국들이 안보군사 동맹 수준으로 관계가 격상하고 상호의존성으로 똘똘 뭉치게 되는 이유가 원자력 기술의 고난도 특성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대 3대에 걸쳐 진행된 ‘신포의 짓다가 만 한국형 원전’은 현재 한반도 비핵화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할 역사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비핵화 드라마의 대미는 평화 에너지가 될 것이다. 비핵화 이후 평화 구조가 종전선언·평화협정 같은 종잇조각과 스틸 사진으로 보장되리라는 발상은 순진하다. 평화 구조는 비핵화의 치열한 실천이 앞바퀴, 식량+인프라+에너지 보상이 뒷바퀴가 되어 굴러가는 자전거와 같다. 두 바퀴가 균형을 이뤄 쉬지 않고 북한 땅을 달려야 하는 진행형이 한반도 평화 에너지 구도다. 평화의 앞바퀴는 북한을 정상국가화하고, 뒷바퀴는 산업에 피를 돌게 해 인민의 생활에 빛을 비추는 에너지이다. 즉, 한반도 평화 구조는 북한의 심장을 한국형 원전이 뛰게 할 때 비로소 돌아가게 돼 있다. 5월 22일의 문재인·트럼프 정상회담과 뒤에 있을 트럼프·김정은 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빼서 버리게 되면 그 자리에 한국형 원전을 들여놓겠다는 두꺼비 노래가 제창되길 바란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