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상대의 지적에 마음 한구석 찔리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한국 사회에 그런 측면이 있고, 그게 꼭 지정학과 정치외교의 문제만은 아님을 나도 기자로 일하며 몇 번 느꼈다. 심지어 그런 정서를 만드는 일을 내가 도왔다. 특히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그랬다.
‘죄 없는 약자의 희생’ 프레임은 늘 옳은가
일상의 억울함이 사회 불신과 복수심으로
물론 두 종류의 기사 모두 언론이 써야 할 내용들이다. 한국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약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어쩌면 그 역사가 수백 년, 수천 년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극을 매번 ‘벼슬아치들의 잘못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또 희생당했다’는 그림으로 보여주려는 데에는 저항감이 일었다. 너무 고민 없고 관성적이고 사회 불신을 조장하는 접근법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었다.
같은 상황에서 미국 언론이 취하는 태도와 비교해보면 그런 특징이 더 두드러진다. 미국 언론은 ‘영웅 만들기’에 몰두하는 듯하다. 현장 경찰관이나 소방관, 지나가던 행인, 아니면 희생자 중에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용감한 행동을 한 사람을 찾아 집중 조명한다. 이 역시 적잖이 호들갑스럽고, 사회적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는 보도 행태다. 다만 그런 뉴스의 독자나 시청자들이 ‘나도 저런 상황에 닥치면 용기 있게 먼저 나서야겠다’는 생각은 좀 더 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한국 언론의 그런 태도는 한국적 정서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언론사도 기업인지라,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찾아다닌다. 말하자면 언론과 수용자가 점점 강도가 커지는 피드백을 주고받는 셈이다.
이러니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렇게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무언가를 잃고 있다고, 또는 목소리가 높은 다른 누군가에게 뺏기고 있다고 믿게 된다. 늘 무언가를 손해 보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 내가 경험한 작은 억울함이 그렇게 몇 단계를 거쳐 사회 전체에 대한 근본적 불신으로, 나아가 복수심으로 발전한다. 이는 우리의 정치외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피해자 정서를 자극하면 공분(公憤)이 일어난다. 이 힘은 불과 같다. 모순과 부조리를 태워 없애는 에너지도 되지만 엉뚱한 곳으로 번지기도 한다. 관료들은 일단 불길부터 잡고 보자고 생각한다. 사건 사고가 터지면 금세 특별대책회의가 열린다.
특단의 대책을 어떻게 며칠 만에 내놓겠는가. 발표 내용을 보면 과거에 논의했으나 무리라고 판단해 기각한 아이디어들이 대거 들어가 있다. 그걸 제도로 만들어 강제하면 새로운 모순 부조리가 된다. 거기에 불만이 쌓인 몇몇 사람들은 옛 사고의 희생자를 탓하고, 그때의 슬픔과 정당한 분노마저 훼손하려 든다.
이런 악순환은 모든 고리를 동시에 손보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억울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권력자들은 작은 비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관행’이라며 넘어갈 게 아니다. 불만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기 전에 스스로 수선하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어려운 주문인 줄 알지만, 그런 한편 정부가 대중의 분노 앞에서도 중심은 잃지 말기를 당부한다. 오늘의 예외가 내일 바로 그 관행이 되고, 모레는 적폐가 된다.
시민의 사명도 있다. 일상의 부조리를 그때마다 지적하고 고발하되 폭력적인 흥분이나 작은 집단의 확증편향과 거리를 두고 차분해지는 것. 언론에 요구되는 덕목도 정확히 마찬가지겠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