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파일럿으로 12일 오후 8시 55분 1부를 방송한 MBC 교양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에 대한 뜨거운 반응도 이 때문이다. 프로그램 포맷은 단순하다. 부부 세 쌍을 관찰 카메라 형식으로 지켜보고 패널들이 스튜디오에서 이를 보며 얘기를 나누는 방식이다.
하지만 첫 시댁 방문에 “예쁘게 하고 오라”는 신신당부에 샵까지 들렀다가 가는 결혼 3개월 차 배우 민지영의 모습이나 둘째 출산을 앞둔 만삭의 몸으로 출장 간 남편 없이 홀로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며 “셋째는 언제 낳을 거냐”는 말을 듣는 승무원 출신 박세미 등 출연자들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들의 부인이라는 동등한 가족 구성원이 겪는 폭력적 경험은 너무도 일상적이고 동시다발적이었다. 패널로 참여한 김지윤 좋은연애연구소 소장은 술상 앞에 둘러앉은 남성과 부엌을 떠나지 못하는 여성을 보고는 “전형적으로 여성은 과대기능, 남성은 과소기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영백 MBC 콘텐츠협력 2부장은 선호빈 감독과 김진영 부부의 고부갈등 극복기를 다룬 다큐 ‘B급 며느리’에 공감을 표했다. “평범한 가족처럼 보여도 일상을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함께 생각해볼 문제가 쏟아져 나온다”며 “지난 몇십년간 고부갈등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수백편이 있었지만, 며느리가 중심이 된 적은 없었다. 한국 사회의 가족관계에 얽힌 서열과 남녀평등 등 다양한 문제를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며느라기’라는 단어가 널리 쓰였으면 좋겠다”는 수신지 작가의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며느라기’를 사춘기, 갱년기처럼 며느리가 되면 겪게 되는 시댁에 예쁨 받고 칭찬 받고 싶어하는 시기로 정의했다. 누군가는 1~2년이면 지나가지만, 누군가는 평생이 될 수 있는 기간 동안 그 복잡미묘한 기분이나 상황을 이야기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취지에서다.
웹툰 속 주인공 민사린처럼 맞벌이로 일하는 여성에게 시댁 적응기는 여러 겹의 고충이 있다. 시어머니가 독하게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아도 회사일 못지않게 시댁에서도 완벽한 며느리가 되고 싶어 스스로를 다그치면 스트레스 또한 커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다양한 콘텐트에서 며느리라는 단어가 천편일률적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며 “새로운 유형이 등장할 때마다 대중이 이를 바라보고 인지하는 시각도 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며느리 사표』의 김영주(53) 작가는 “지금은 SNS가 있지만 우리 때는 며느리로서 고충을 함께 나눌 공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며 “그것이 답안이 될 순 없지만 거기서 힌트를 얻은 여성이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하고, 사회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아들이 “나도 나중에 결혼할 때 ‘며느리 사표’부터 쓰게 할 거야”라고 말하는 바람에 반가우면서도 멍했다고 고백했다. 언젠가 자신도 며느리 입장이 아닌 시어머니 입장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해 미국에서 시작돼 한국으로 이어진 ‘미투’ 운동이나 대중문화에서 확산되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의 근본적인 이유는 같다. 변화하고 있는 여성의 역할과 지위에 따라 그에 맞는 이해방식과 체제가 재정립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나 1인가구 증가 등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생활 속 학습을 통한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