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논설위원이 간다]해외 아웃소싱 시대···영국 비자도 필리핀에서 처리된다

중앙일보

입력 2018.04.09 00:05

수정 2018.04.1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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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간다 - 남정호의 '세계화 2.0'  

중국 다롄에 세워진 델 컴퓨터 콜센터. 한국 담당 직원들이 컴퓨터 스크린을 보며 고객들의 문의를 처리하고 있다. 제공: 일본 PC Watch/오오가와라 카쯔유키(大河原 克行·촬영)

 전자제품이 고장 났거나 사용법을 모를 때면 스스럼없이 전화해서 물어보는 고객 서비스 센터. 응대하는 상담원들이 여간 친절한 게 아니다.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오만가지를 물어도 짜증 내는 기색 없이 끝까지 들어준다. 한데 이들의 상당수가 중국·미국 등지의 해외 콜센터에 앉아 상담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국 땅에서 일본·중국은 물론 미국 고객들을 상대하는 콜센터마저 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빨리 세계화가 이뤄지고 있는지 절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장이다. 이제는 국내를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는 서비스 아웃소싱의 현장을 취재했다.  
 
 
고즈넉한 서울 정동에 자리 잡은 영국대사관의 한국인 직원 A씨. 열심히 일하던 그는 프린터 용지가 떨어진 걸 알았다. 그러자 그는 비품 보관용 캐비넷으로 향하는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영어 메일을 썼다. "프린트 용지가 떨어졌으니 보내주세요"라고. 수신처는 다름 아닌 2600여 Km 떨어진 필리핀의 아웃소싱 회사. 메일을 받은 필리핀 직원은 바로 대사관 내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에게 지시했다. "2층에 프린트 용지를 갖다 주어라"고. 불과 몇 분 만에 A씨는 원하던 종이를 얻을 수 있었다. 첨단 정보통신 발달과 글로벌 아웃소싱의 확대가 빚어낸 진풍경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국 대사관은 건물 경비에서부터 직원 채용, 봉급 지급 등 인사·재무관리까지 핵심적인 외교 업무 외에는 대부분을 외부업체에 맡긴다. 심지어 외교부 고유업무로 여겨지던 비자 발급까지 글로벌 업체에게 맡기고 있다.

vfs 글로벌 사무실 입구에 걸린 안내판. 이곳에서 뉴질랜드와 영국 비자 업무를 처리한다고 돼 있다. 남정호 기자

 
서울 숭례문 옆에 자리 잡은 단암빌딩. 이 건물 5층에는 9개국 대사관의 비자 및 거주증 발급을 맡아 처리해주는 vfs 글로벌의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다. vfs는 이곳 말고도 인도 비자 업무를 대행해주는 별도 사무실을 서울 한남동에 두고 있다.

서울 숭례문 옆 단암빌딩 5층에 자리잡은 vfs 글로벌의 비자발급 대행 사무실 입구. 남정호 기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리니 업무를 대행해주는 나라 이름이 적힌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국가별로 나눠진 3개의 vfs 사무실 입구는 모두 말끔한 유리문으로 돼 있었다. 테러 문제 때문인지 비자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실 안은 촬영 금지다. 유리문을 통해 보니 내부는 깔끔하고 세련된 실내장식이 인상적일 뿐 다른 대사관 비자처리 창구와 비슷했다.  

비자 업무 개인 업체에 맡겨 처리
외교 업무 빼고 대부분 아웃소싱

싼 통신비로 해외 아웃소싱 급증
델컴퓨터, 중국서 콜센터 운영해

다국적기업 콜센터 국내 진출
한국, 콜센터 허브로 성장 가능

vfs글로벌 사무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다른 대사관의 비자처리 창구과 비슷했다. 남정호 기자

 2001년 설립된 vfs는 영국·캐나다·사우디아라비아 등 모두 58개국의 비자 업무를 대행하고 있다. 동북아 담당 지역 본부는 필리핀 마닐라로 중국을 뺀 한국·일본 등 8개국에서 접수된 비자 관련 서류는 모두 외교 행랑에 실려 이곳으로 보내진다. 그러면 각국 정부에서 파견된 담당 직원들이 비자신청 서류를 검토한 뒤 발급 여부를 결정한다. 이렇게 대사관마다 비자 담당 직원을 두는 대신 한 곳에서 한꺼번에 처리토록 함으로써 인건비를 대폭 줄 일 수 있다.  

전 세계 58개국 정부를 대신해 비자 발급을 대행해 주는 vfs 글로벌.

 마닐라에서 일하는 아툴 랄 vfs 동북아 대표는 "한해 150만 건가량의 비자 신청을 처리하고 있으며 한국은 무비자 협정을 맺은 나라가 많아 6만여 건 정도"라고 밝혔다. 이렇듯 국경을 넘는 아웃소싱으로 '작은 정부'를 만들려는 노력은 외국에서는 꽤 오래된 얘기다.  
 사실 국내에서도 비용을 덜거나 자체적으로 하기 어려운 업무를 해외에 맡기는 아웃소싱은 드물지 않았다. 비용 절감의 경우는 제조업체에서 핵심기술이 필요 없는 일반적인 부품을 값싸게 만들기 위해 외부업체에 맡게 생산하는 형태였다. 아니면 국제 시장을 겨냥한 월드카 디자인처럼 외국 회사에서 맡는 게 유리할 때도 해외에서 아웃소싱했다.
 하지만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우선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 분야에서도 아웃소싱이 늘었을 뿐 아니라 해외업체에 의뢰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콜센터다. 제품 안내에서 불만 사항 접수에 이르기까지 고객들을 상대하는 전화 상담원을 국내가 아닌 해외에 두고 운영하는 것이다. 미국·영국 등지에서는 일반화된 지 오래지만, 국내에서도 콜센터를 해외에 두는 경우가 어느 틈에 늘었다.  

델 컴퓨터 로고

 이 분야의 대표적인 선두 주자는 델 컴퓨터. 2004년 일찍이 콜센터를 중국 다롄(大連)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한국어에 능숙한 조선족들이 국내에서 걸려오는 애프터서비스 요청을 처리해 준다. 실제로 델컴퓨터 홈페이지에 적힌 080(수신자 부담) 번호로 전화해 보니 완벽한 한국어의 콜센터 직원이 응답한다. 정말 해외인지 의심쩍어 "거기 중국이냐"고 묻자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곳뿐 아니다. 애플은 전화 상담 콜센터를 미국에 두고 있다. 이처럼 많은 업체, 특히 외국계 기업들이 해외 콜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물론 비용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임금이 꽤 올랐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보다 훨씬 싸다. 게다가 한국어에 능숙한 조선족들도 쉽게 찾을 수 있어 콜센터 운영에 안성맞춤이다.  
 또 해외 각국에 콜센터를 두지 않고 한군데로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임금이 비싸더라도 관리와 시설 운영비 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애플이 바로 그런 경우다.  
 최근 들어 새롭게 나타나는 현상은 콜센터 아웃소싱이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경우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다국적 기업의 글로벌 콜센터를 국내에서 운영 중인 유베이스의 경기도 부천 본사. 유베이스 제공

 상징적인 케이스가 요즘 급성장한 다국적 기업 A사의 동북아 콜센터다. 이 회사는 국내 최대 콜센터 운영업체인 유베이스와 손잡고 지난해 한·중·일 3개국의 콜센터를 부천에 설치했다.  

국내 굴지의 콜센터 업체 유베이스의 허대건 대표. 안성식 기자

 이곳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중국 고객의 민원을 각국의 해당 언어로 처리해 준다. 물론 이곳 직원들은 유학 또는 결혼 때문에 국내에 온 일본·중국 원어민이거나 교포들이 대부분이다.  
 또 일본 이토추 상사의 자회사인 벨시스템24도 지난해 9월 국내업체인 한국코퍼레이션과 업무협약을 맺은 뒤 해외 고객을 상대한 300석 규모의 콜센터를 대전에 설치했다. 어느 틈에 외국업체를 대신해 해외 고객들을 상대하는 글로벌 콜센터가 한국 땅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어쨌거나 이처럼 우리 일상생활 곳곳이 어느 틈에 해외와 직접 연결된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글로벌 아웃소싱이 늘면 이에 따른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재로는 좋은 점이 많다는 게 전문가의 진단이다. 현혜정 경희대 교수는 "이론적으로는 해외 아웃소싱을 할 경우 국내 일자리가 해외 인력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아직은 기술 진보가 실업의 더 큰 요인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특히 글로벌 콜센터를 많이 유치하면 국내에 적잖은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황규만 한국컨택센터산업협회 사무총장은 "임금이 비싼 일본이나 규제가 까다로운 중국에 비해 한국이 글로벌 콜센터를 세우기에 유리하다"며 "정부가 지원만 잘하면 한국이 동북아 내 글로벌 콜센터의 허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