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손이 간 건 재일교포 2세 김창생(67)씨의 산문집 『제주도의 흙이 된다는 것』이다. 부산의 '전망'이라는 출판사에서 낸 책은 반짝반짝 광택이 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디자인이 수수한 편이다. 그런 외형에 어울리게 김씨의 글은 화려하거나 허세 부리지 않고, 우리가 흔히 진솔하다고 표현하는 느낌에 가깝다.
이름의 인상과 달리 여성인 김씨는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여공생활도 했다고 하니 유복한 형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2006년 제주도에서 열린 '재일 제주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한 게 계기가 돼 부모님의 고향 제주도 정착을 결심했고, 실제로 역시 부모가 제주도 출신인 남편과 함께 2010년 제주로 이주했다. 책은 그러니까 김씨의 제주도 정착기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살아보니, 식의 몰역사적 슬로우 라이프 책은 아니다. 김씨가 한국어판 서문에 쓴 대로(김씨는 일본어로 글을 쓴다. 책의 일본어판 『제주도에 살면』은 지난해 출간됐다) 4·3에 대한 글이 압도적으로 많다.
많은 사람에게 제주 4·3은 추상적인 숫자로만 짐작되는 슬픈 과거사다. 남로당 무장봉기 이후 6년 6개월에 걸친 진압과정에서 전체 제주도민 30만 명 중 10분의 1에 해당하는 2만5000~3만 명이 희생됐다는 사실의 기막힘을 우리는 뼛속 깊이 실감하기 어렵다. 머리로만 받아들일 뿐이다. 진아영 할머니의 사연은 구체적인 참담함으로 4·3의 진실을 전한다.
4·3 하면 이산하 시인의 서사시 『한라산』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읽어도 파격적인 내용의 시집은 5공 정권이 서슬 퍼렇던 1987년 3월 사회과학 무크지 '녹두서평'에 발표돼 파장을 불렀다. 못 찍겠다는 인쇄소를 설득하며 잡지를 출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삭제했던 반미, 북조선에 대해 언급했던 대목을 이번에 되살려 노마드북스에서 복간했다.
이산하 시인은 시집 뒤에 실린 '저자 후기'에서 시가 쓰여 우여곡절 끝에 발표되고 붙잡혀 재판받기까지 전 과정을 소상히 밝혀 놓았다. 87년 대선 직전 열린 이씨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재판에서 대선에 끼칠 영향을 염려한 때문인지 유력한 진보문인들이 법정 증언을 거절했다는 내용, 당시 검찰의 담당 검사가 황교안 전 총리였다는 점 등이 눈길을 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