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군은 처형 당시 만고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 형을 당했는데 어떻게 베이징 한복판에 묘가 있나.
“처형당한 원 장군의 목이 저잣거리에 걸렸다. 그런데 밤 사이 목이 없어졌다. 원 장군을 모시던 부관 중의 한 사람이 몰래 훔쳐 묻었다. 역적의 묘를 만들어 모신 사실이 발각되면 극형을 면치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 분은 죽는 날까지 변성명을 하고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바로 우리 집안의 조상인 서 의사(義士)다. ”
“서 의사는 대대로 원장군의 묘를 지키고 돌보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손들은 학문에 정진하되 벼슬은 하지 말라는 유언도 함께 남겼다. 원 장군처럼 올곧은 관리는 불행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벼슬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충절과 예의 도리는 알아야겠기에 학문을 게을리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우리 가문은 388년간 같은 장소에 살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원장군 묘와 사당을 관리하고 모셨다. 그 사이 중국의 천하는 명(明)에서 청(淸)으로, 이어 중화민국을 거쳐 지금의 신중국까지 바뀌었다. 4조(朝) 5세기(17∼21세기)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가업이다. ”
“누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충의를 본받는 일은 후손의 도리 아닌가. 많은 분들이 나를 칭찬해 주셨고,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도 받았다. 하지만 찬양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 집안이 아니라 원 장군이다. 우리 가문은 그 분의 높은 정신에 감염된 것 뿐이다. ”
-생활에 도움이 안되는 일을 하다보면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문화대혁명 때 사당과 묘가 완전히 파괴됐다. 문혁이 끝난 뒤 24년 동안 관계 기관을 찾아다니며 사당과 묘, 비석을 복원해 달라고 청원했다. 아직도 온전한 옛모습이 아니다. 2수년 전부터 국가가 관리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우리 집을 내놓고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는데 그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지금도 건강하면 매일 찾아갈 텐데 거동이 불편해 그러지 못한다. ”
서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던 아들은 광둥(廣東)성 둥관(東莞)에 있는 원숭환 기념관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로 젊은 나이에 숨졌다. 그는 둥관의 원숭환 의관총(衣冠冢ㆍ 옷을 묻은 무덤) 옆에 묻혀 영원히 원 장군의 곁을 지키고 있다.
인터뷰 내내 옆을 지키던 딸은 서 할머니를 ‘살아있는 문화유산(活文物)’이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서씨 집안의 388년 수묘를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기자는 “할머니는 충의를 몸으로 가르치는 살아 있는 교과서(活課本)”라는 말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