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계 제조사인 C사에서 조립 일을 맡은 두 직장 동료가 있다. 한 명은 10년 차 숙련공, 한 명은 1년 차 초보다. 10년 차가 시간당 10개의 시계를 조립하는 데 반해 1년 차는 4~5개 수준에 그친다. 이들은 시계 조립이라는 '동일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노동의 가치는 물론 다르다.
청와대가 20일 노동권을 강화하기 위한 헌법개정안을 내놓으면서 재계와 경영학계에서는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개헌안 내용 중 노동과 임금에 대한 대목은 ‘동일 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수준의 임금 지급 노력 의무화'로 요약된다.
숙련도 같은 노동가치 비교 측정 불가
학계에서는 '동일 노동 가치'뿐 아니라 숙련도가 차이가 나는 직원들이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동일 노동'으로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같은 일을 하는 C사의 두 직원 간에 두 배 이상의 효율성 차이가 있는데 동일 임금을 지급하면 또 다른 불평등 문제가 생긴다.
임금 부담 늘면서 오히려 불평등 심화 가능성
재계에서는 '동일 노동 가치, 동일 임금'이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들은 성과주의를 앞세우고 창의성·효율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임금 정책 방향을 잡고 있다"며 "동일노동 가치, 동일임금 의무화는 산업화 시대의 낡은 개념이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근로기준법이나 노동법이 아닌 헌법에 이런 가치를 명문화하면 친노조 국가라는 이미지를 부각해 투자유치를 어렵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일자리 늘리기에도 도움이 안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스·포르투갈 등만 헌법에 명시
경영학계는 노동의 가치와 임금을 법률이 아닌 헌법에 담는 것이 적절한지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일 노동 가치라는 모호한 내용을 최상위법에 명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얘기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모법인 헌법에는 큰 정신과 가치, 방향성, 원칙을 담아야 한다. 이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위법이나 개별법에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법이 구체성을 띄면 하위법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헌법에 명시한 국가로는 그리스·아르헨티나·포르투갈·멕시코 4개국이 꼽힌다. 모두 자본주의 리더 국가나 산업 선진국이라고 보기 어려운 나라들이다. 조 교수는 "헌법이 아닌 하위법에 이 정신을 넣은 나라들은 많지만, 이 경우에도 젠더(성), 종교 등을 이유로 부당한 임금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이라며 "같은 직군에 있는 사람은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강제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급여 제도의 선진화를 위해 노동 가치와 임금을 연계할 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의 직무급제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경제연구원 정조원 고용창출팀장은 "미국의 경우 영업 10년 차는 얼마, 인사 5년 차는 얼마처럼 업종별·연차별로 급여 수준이 정리돼 있다. 직무급이 노동시장의 표준가격처럼 작동해 같은 직급의 인력을 고용하면 비용 부담이 갑자기 늘거나 줄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유럽도 처음부터 직무급이 정착한 것은 아니다. 산업 개발 시기에 호봉제로 시작했다가 산업이 고도화되고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직무급으로 전환했다. 한국의 경우 고속 성장하면서 급여 체계가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고성장 시기에는 직원들의 호봉이 높아져도 기업이 여력이 있지만, 지금처럼 저성장에 접어들면 높은 호봉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정 팀장은 "국내에서는 생산직의 70%가 호봉제여서 정규직 내에서조차 ‘동일 노동·동일 임금’ 대신 근속연수 등으로 임금이 차등 적용된다"며 "직무급 체계로 빨리 옮겨가야 노동시장의 불균형 문제부터 고용 안정성 문제까지 함께 풀린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