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바랜 청바지에 운동화, 진회색 스웨터 위에 걸친 검정 조끼. 검은색의 낡은 카메라 가방을 메고 그는 전시장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누를 만반의 준비가 된 차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 가방에서 작은 후지 카메라를 꺼내어 전시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제가 구보타 히로지입니다." 그가 바로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구보타 히로지, 아시아를 사랑한 매그넘 작가'의 주인공이었다.
구보타 히로지는 세계적 사진가 그룹인 '매그넘'(Magnum)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이자 일본 유일의 매그넘 작가이다. 학고재 본관과 신관에 걸쳐 열리는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히로지의 작품 활동 50년을 아우르는 자리로, 그의 작품 총 109점을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학고재, 구보타 히로지 회고전
50여 년 활동 보여주는 총 109점
그가 20대부터 "호기심에 홀리고" "사진에 미쳐" 고국인 일본을 떠나 유목민처럼 지구촌을 돌아다니며 포착한 다채로운 문화권 풍경이 갤러리 곳곳을 채우고 있다.
"사진은 내 생애의 가장 큰 집착"
1939년 도쿄의 유복한 가정에서 차남으로 자란 히로지씨는 와세다대 정치학과 출신. "부모님은 내가 대기업 사원이 되기를 바랐다. 나도 그렇게 되는 게 효도인 줄 알고 자랐다"는 그는 "그러나 대학 졸업 전인 61년 일본에 촬영론 매그넘 작가 하마야 히로시(1915~1999)를 만나며 내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운동을 촬영하던 히로시의 조수 역할을 했던 그는, 히로시를 통해 또 다른 매그넘 작가 엘리엇 어윗 등을 만나며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저는 그 전에 미술을 배운 적도, 사진을 배운 적도 없었어요. 암실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고요. 그런데도 나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죠." 62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다 했다.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는 그는 3년 뒤인 65년 매그넘 작가가 되었다. "내가 재능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었고, 내가 직접 확인할 수도 없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고, 찍는 게 좋아서 했을 뿐이었다."
지구촌을 떠돈 역사의 기록자
중국 문화대혁명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45개가 넘는 중국 지방을 일주하며 위구르족, 몽골족, 후이족 등을 촬영했다. 당시 사회 풍경과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35mm 렌즈 안에 담백하게 건져 올린 작업은 의미 있는 역사의 기록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가 한국을 처음 찾은 것은 66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78년의 일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북한의 엄격한 규율을 잘 지킨 그는 북한 정부의 신뢰를 얻어 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며 북한 사회의 모습을 다양하게 기록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남북의 명산 풍경과 2007년 서울 한강 주변의 항공 사진, 1970~1990년대 북한 사진들도 함께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드라마를 품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흑백을 고집하던 그가 컬러 사진으로 찍기 시작한 변화도 엿볼 수 있다. 미얀마의 황금바위 앞에서 기도하는 승려를 촬영한 '불교 성지 황금바위, 짜익티요, 미얀마'(1978)다. 이 사진을 포함해 70년대 후반 '다이-트랜스퍼' (dye-transfer)기술로 프린트한 그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색채 사진을 인화할 때 염료를 전염지 위에 순차적으로 겹쳐 인화를 마무리하는 기법이다. 보통 다이-트랜스퍼는 3색으로 이뤄지지만 8색으로 프린트하기 위해 엘리엇 어윗의 소개로 독일 함부르크의 장인 니노 몬데(Nino Mohnde)를 열세 번이나 찾아갔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다이 트랜스퍼는 화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색을 구현하는데 탁월하다는 것.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표현에서는 회화적이면서도, 작가의 개입이 절대 과해 보이지 않는 그의 사진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나를 이끈 것은 호기심
학고재와 (주)유로포토/매그넘한국에이전트가 함께 여는 이번 전시는 4월 22일까지 계속된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