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지금까지 미투 운동은 진보 진영 인사들에게 집중됐다. 차기 대선 유력 주자이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까지 퇴장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미투마저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음모론이라면 딱하고 서글픈 일이다. 문재인 정부와 진보 지지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게 김어준씨 주장인데, 그렇다면 성추행 내지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은 정치 공작의 희생양이란 뜻이다. 물론 김씨가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정치보복 주장만으론 설득력 약해
보수미래 헤아리는 메시지 나와야
딱하고 안타까운 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비슷한 느낌을 만든다는 것이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그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말을 아끼겠다”고 했다. 하고 싶은 얘기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 보복’이란 주장일 거다. 적과 동지가 분명해 낯 가리는 거론 결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친노, 친문이다. 오로지 그 배타성 때문에 적폐로 몰렸다는 얘기였을 것이다.
그런 측면이 없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혐의가 나온 뒤 시작된 게 아니다. 먼저 표적으로 삼고 반년 넘게 탈탈 털어댔다. 자원 외교나 4대 강 사업은 박근혜 정권 때도 여러 차례 감사원 감사와 수사가 있었다. 국정원과 기무사의 정치 댓글 사건도 똑같은 검찰이 의욕을 갖고 덤볐지만 그에게 뚜렷이 책임을 물을 만한 게 없었다. 그래도 국세청 세무조사→주변 털기→망신주기로 가더니 확대됐다. 문명국가라면 일반인에게도 이래선 안 된다. 그 정도 털면 누구라도 걸린다.
문제는 이 와중에 ‘정치 보복’ 주장만으론 넘어갈 수 없는 혐의가 꽤 추가됐다는 거다. 이 전 대통령은 무엇이 왜 사실이 아닌 건지 떳떳하게 해명해야 한다. 그래야 의심이 사라진다. 정치 보복만 외치는 건 김어준이 미투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우리도 노무현 정권 시절 일들을 알 만큼 안다’고 흘리는 건 협박이다. 안다면 털어놓는 게 당당한 길이다. 더구나 이 전 대통령은 일반 피의자가 아니라 전직 대통령이다. 한국 정치의 품위가 걸려 있다. 지지자의 자존심도 있다.
10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로 될 것을 걱정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두 전직 보수 대통령에게선 보수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메시지를 듣지 못한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 과정에서 몇 번이나 실기하더니 결국 정치보복 주장에만 매달렸다. 이 전 대통령도 같은 길로 방향을 잡는 모양새다. 그래선 궤멸 상태의 보수를 살릴 수 없다. 지금은 말을 아낄 때가 아니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