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의 한 교내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대학생 A씨(21)는 지난해 9월 MT 장소를 알아보러 동기 B씨(21)와 인천 월미도로 갔다.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 A씨가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하자 B씨는 그를 모텔로 데려간 뒤 수차례 강제 추행했다. A씨의 완강한 거부로 그 이상의 행위는 막을 수 있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돌이킬 수 없었다.
이 일을 듣게 된 지인들의 반응은 A씨의 상처를 더 키웠다. 친한 사람들조차 ‘(B씨가 쓴 방법을) 나도 써먹어야겠다’‘유치한 걸로 오래 끌지 말고 화해해라’며 가볍게 대꾸했다고 한다. A씨는 교내 인권센터에도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인권센터 직원으로부터는 “남자들은 그게 잘못인지 모른다”“사회 나가면 더 하다” 등의 말을 들었다. A씨는 “가해자ㆍ2차 가해자들로부터 받은 피해를 상담하고 처벌을 논의하러 간 센터는 다른 2차 가해자와 다를 바 없었다”고 호소했다.
사건 축소·신상털기…다양한 2차 피해
성폭력 피해자가 경험하는 '2차 피해'는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조직 내에서 사건을 축소하려 하거나 원치 않게 피해자의 신상이 노출된다. 가해자 측의 합의 종용 또는 역고소, 수사 과정에서 겪는 피로도 또한 크다. 그만큼 2차 피해에는 다양한 가해 주체와 유형이 있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 피해 상담 내용 중 2차 피해 경험이 드러난 사례는 19.3%였다.
미투(#MeToo) 운동의 확산 속에서도 피해자들의 2차 피해는 속속 발견되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정무비서였던 김지은씨는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한 이후 이혼 경험과 가족의 이력 등 확인되지 않는 소문들에 휩싸였다. 김씨는 12일 자필 편지를 통해 “(폭로)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다. 신변에 대한 보복도 두렵고 온라인을 통해 가해지는 무분별한 공격에 노출돼 있다”고 밝혔다.
김현아 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알리기 위해 피해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많은 걸 드러낼 각오를 해야 한다”며 “특히 잘 아는 사람마저 비난이나 편견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큰 상처를 받는다”고 말했다.
가해자는 '고소 폭탄'으로 피해자 압박
가해자 측이 피해자에게 무고·명예훼손·모욕 등 온갖 혐의를 들어 ‘고소폭탄’을 날리기도 한다. 증거가 없거나 불완전한 경우가 많은 성폭력 사건의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또 권력형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 대다수가 사회적으로 힘 없는 약자라 가해자 측 고소에 큰 부담을 느끼기 쉽다. 실제로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폭로한 한 20대 여성은 가해자로부터 민·형사상 소송이 몇 건씩 동시에 들어와 부모님까지 사실을 알게되자 가해자에게 ‘소송을 취하해 달라’는 반성문을 썼다고 한다. 허윤 법무법인 예율 변호사는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피해자를 압박하는 수단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법적 소송이다”고 설명했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성폭력 사건과 그 이후 피해자들이 받는 다양한 2차 피해들은 여성을 대상화하고 차별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현재는 성폭력 관련 정책들이 고용노동부·여성가족부 등으로 쪼개져 있는데 흩어진 것들을 모아 성폭력 예방서부터 피해자 보호, 가해자에 대한 조치, 2차 피해 방지까지 사각지대 없이 전 과정을 지원하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신진희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는 “다른 형사사건과 달리 이상하게 성폭력 사건에서 대중은 피해자가 어떤 사람인지 집요하게 궁금해 한다”며 “성폭력을 개인사적 문제가 아닌, 사회 범죄로 보는 인식이 보편화 돼야 한다”고 말했다.
홍상지·최규진·김정연·정진호 기자 hongsa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