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채텀하우스의 제임스 닉시 러시아ㆍ유라시아 책임연구원은 오는 18일(현지시간) 치러질 러시아 대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러시아 당국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70% 투표율에서 70%를 득표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만약 실현되지 못할 것 같으면 수치를 조작하려 들 것"이라고 ABC 방송에 말했다.
러시아 대선에서 푸틴의 연임이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기관인 브치옴의 이달 초 조사 결과 푸틴 대통령은 지지율 69%를 기록했다. 푸틴 외에 7명이 출마했지만, 누구도 푸틴의 적수가 못 된다. ABC 방송은 “관심을 끌기 위해 색채가 다양한 후보들을 내세웠지만 각본은 이미 쓰여 있고 무대에서 마지막 연기만 남았다”며 “모두가 알듯 ‘황제’ 푸틴이 등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18일 대선서 네번째 집권 확실 "현대판 차르의 지배"
투표율 70% 득표 70% 목표…"선거 아니라 재대관식"
핵무기 공개, 크림반도 반환 거부 등 강한 리더 추구
낙후 인프라, 에너지 의존 경제 살릴지가 시험대
‘강한 러시아’ 건설을 내세워온 푸틴은 이번 대선 TV토론에는 참석하지 않은 대신 지난 1일 국정연설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미사일을 공개했다. 이어 미국의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을 뚫을 수 있다며 단검이라는 뜻의 초음속 미사일 ‘킨잘’ 시험발사 성공 소식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러시아 국방부는 서유럽을 겨냥한 중거리탄도미사일 ‘아방가르드'도 대기권에서 초음속으로 비행해 요격이 불가능하다며 양산에 나섰다.
2014년 우크라이나로부터 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크림반도를 병합한 푸틴은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이 4년 넘게 경제제재를 이어오고 있음에도 반환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최근 지지 언론인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푸틴’에 등장해 “크림반도 병합 문제는 역사적으로 종결됐으며 반환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이 실시되는 3월 18일은 크림반도 병합 4주년이기도 하다.
푸틴은 지난 2일 초당파 사회단체 러시아인민전선 주최 미디어포럼에서 ‘할 수 있다면 어떤 역사를 바꾸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소련의 붕괴”라고 답하며 유권자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CNN은 “푸틴은 소련 붕괴와 경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해낸 강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며 “러시아를 국제사회에서 힘 있는 국가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노력이 그에 대한 지지의 원천"이라고 분석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시 주석 등과 함께 ‘원조 스트롱맨’으로 분류되는 푸틴이 장기집권에 돌입하지만 도전 요인은 남아있다. 우선 내부의 반발이다. 군주나 독재 정권이라도 원만한 집권을 위해선 합법성이 필요하다. 대선 투표율이 현저히 낮을 경우 푸틴의 정통성에 금이 갈 전망이다. 부패 혐의를 이유로 출마 길이 막힌 푸틴의 정적 알렉세이 나발리는 이미 이번 대선을 가짜로 규정하고 투표 보이콧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의 아르카디 오스토로브스키 러시아 담당 에디터는 “러시아에서 투표율 숫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과거 크렘린궁은 한 사람이 여러 번 투표하게 하거나 투표함을 채우는 방식으로 투표율을 조작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면 소셜미디어에 폭로될 것”이라고 말했다.
더 큰 시험대는 경제다. 2014년부터 시작된 서방의 경제제재와 함께 국제 유가 하락의 영향으로 2015~2016년 러시아는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해외 부채 의존도를 낮춘 끝에 지난해 경제성장률 1.5%를 기록하며 경제가 살아나는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세계 평균에는 1%포인트 이상 밑도는 형편이다.
특히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는 가운데 산업 자동화 수준은 낮고 노동력은 부족하며 인프라 낙후 정도도 심각하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진단했다.
푸틴의 장기 1인 통치는 법적으로만 보면 이번이 마지막이다. 현행 러시아 헌법은 세 번 연임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푸틴의 다음 임기에선 정치적 불안정이 가속할 수 있다.
채텀하우스의 닉시 연구원은 “푸틴도 자신이 어떻게 할지는 아직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헌법 개정을 시도할 수도 있고 후계를 세워 정치적 영향력 유지를 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임기가 끝나면 그는 71세가 된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에 민주주의 시스템이 자리 잡지 않을 경우 다음 통치자는 권력 투쟁 끝에 출현할 것"이라며 “핵무기를 가진 나라에서 분열은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불행하게도 국가 통치 권력을 부드럽게 이양해온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차르 푸틴의 재집권은 ‘푸틴 이후’라는 물음표를 세계에 던지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