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이상화와 고다이라의 포옹에 대비되는 문 대통령과 아베의 갈등

중앙일보

입력 2018.02.1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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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메달 이상화와 고다이라의 우정 이야기’(아사히), ‘네가 있어서 더 강해졌다’(마이니치)
19일자 일본 신문들의 제목들이다. 고다이라 나오(小平奈緒)의 평창 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 금메달 소식을 대서특필한 일본 신문들은 고다이라와 이상화가 보여준 ‘또다른 드라마’에도 열광했다. 
 

일본 아사히 신문에 보도된 고다이라 이상화 선수의 사진 [아사히 신문 캡쳐]

이상화 고다이라의 포옹 장면을 크게 실은 요미우리 신문 기사[요미우리 신문 캡쳐]

일본 언론들은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에게 고다이라가 다가가 한국말로 “잘했어”라고, 그리고 “난 아직도 널 존경해”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경기장에선 ‘숙적’이라 불리지만 시합이 끝난 뒤 ‘친구’로 돌아간 두 사람의 스토리도 자세하게 전했다. 

고다이라와 이상화 포옹에 日언론들 대서특필
아베 총리,고다이라에 "포옹장면 너무 멋져"
세계를 감동시킨 포옹,한일 정치 갈등과 대비

9일 평창 정상회담 뒤 양국 관계 악화일로
아베 총리,브리핑 대신 日언론에 플레이
청와대, 한미훈련 대화 공개로 갈등 키워

이상화가 18일 강원도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를 마친 뒤 고다이라 나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고다이라는 이상화에게 먼저 다가가 한국말로 ’잘했어“라고 말했다. [뉴스1]

평소엔 한국 관련 기사속에 잔뜩 가시를 박아뒀던 우익ㆍ보수 신문들도 두 사람의 포옹 장면만은 크게 다뤘다. 물론 고다이라의 승리로 마음이 너그러워진 탓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18일 오후 강원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경기에서 이상화가 레이스를 마친 뒤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가 서로를 축하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두 선수 사이가 어떻게 마냥 좋기만 하겠는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경쟁해야 하는 숙명, 게다가 "일본(한국)과의 경쟁에선 ‘가위,바위,보’도 져선 안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한·일전의 압박에서 두 선수 모두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숙적’ 두 사람이, 그것도 승패가 갈린 직후에 만들어낸 이례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은 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다음날인 19일 오전 이뤄진 아베 총리와 고다이라 선수의 전화 통화에선 이런 대화가 오갔다.


 ^아베=“시합이 끝난 뒤에 한국의 이상화 선수와 이야기를 하던데 어떤 말을 했습니까.”
 ^고다이라=“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대회인만큼 이상화 선수도 너무나 큰 압박속에서 금메달을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에 ‘잘 했다’는 말을, 또 그는 여전히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아직도 존경하고 있다’는 말을 전달했습니다.”
 ^아베=“시합이 끝난 뒤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축하해주는 광경은 정말로 너무 훌륭했습니다.”
 
두 라이벌의 우정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현재 양국간에 벌어지고 있는 이전투구 수준의 갈등때문일 것이다. 지난 9일 평창에서 열린 정상회담 뒤 양국 관계는 더 내리막 길을 걷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따지러,남북간 대화무드에 쐐기를 박으러’ 평창에 간다던 아베 총리에게 어차피 정상회담은 국내용이었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회담 당일 브리핑에서 "정상끼리의 자세한 대화는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중에 했던 발언들은 ‘문 대통령을 몰아세운 무용담’으로 포장돼 보수 신문을 통해 며칠 뒤 모두 보도됐다. "박근혜 정부때 (일본이 예산으로 낸 10억엔 등) 취할 것은 취하고 (합의는)실행하지 않겠다는 건 있을 수 없다","문 대통령은 국민들에게서 (70%라는)높은 지지를 받고 있으니 위안부 합의 이행을 결단해라"는 발언등이다.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9일 오후 평창 블리스힐스테이트에서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가차 방한한 아베 신조 일본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회담에서 “(평창 올림픽때문에 연기된)한ㆍ미연합훈련을 더 늦춰선 안된다”고 주장했다가 문 대통령으로부터 “주권문제이자 내정문제로, 총리가 말하는 건 곤란하다”고 핀잔을 들었던 아베 총리는 14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한미연합훈련은 중요한 문제”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한·일간에 벌어진 논란에 미국까지 끌어들였다. 

지난달 11월 6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쿄(東京) 모토아카사카(元赤坂)에 있는 영빈관에서 만찬을 하며 건배를 하고 있다.[도쿄 교도=연합뉴스]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관방 부장관은 방송에 출연해 “북한은 단순히 한국의 내정 문제만이 아니라 일본,아시아, 미국 등 전세계적으로 최대의 위협”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의 일개 참모가 공개적으로 이웃나라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 비판한 셈이다.  
 
우리 청와대도 잘한 건 없다. 아베 총리와 문 대통령간 한·미연합훈련 관련 대화를 먼저 공개함으로써 논란을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훈련 문제를 언급했고, 문 대통령이 불쾌감을 표시한 관련 대화 내용은 회담 다음날인 10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이 관계자가 왜 갑자기 양국 정상들의 대화를 공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정부와 자민당에선 "정상들간 민감한 대화를 국내 여론을 의식해 일부러 공표했다"는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어렵사리 정상회담을 성사시켜놓고도 끊임없이 이전투구를 이어가는 양국 수뇌부의 모습이 최선을 다한 뒤 서로를 인정하고 축하하는 고다이라와 이상화의 포옹과 극단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양국의 정치인들은 말로만 ‘미래지향’을 외치기보다 두 선수의 포옹이 왜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는지부터 곰곰히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