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 컷 ㉔ 강희숙(소피아 강)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일찍이 집 밖에서 바깥구경을 많이 했다. 어른들 감시 없이 눈치 보지 않고, 누가 좋은 아이이고 나쁜 아이인지 옳고 그름을 잘 가려, 해질 때까지 신나게 논 골목대장이었다.
여름엔 주로 남산에 올라가 놀았고, 겨울엔 스케이트 타러 서울 변두리의 야외스케이트장에 가 여자애들이 주로 신는 피겨스케이트를 타고 스피드 스케이트를 신은 남자 또래 애들과 스피드 달리기 경쟁도 했다. 발목을 몇 번 삐었지만 그래도 매년 겨울이 오면 그때 먹은 떡볶이와 뜨끈뜨끈한 어묵 국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뺑뺑이’ 고등학교 시절, 난 뽑기에 운이 없나 보다. 변두리에 있는 명지여고가 됐다. 그땐 난 이미 미술에 푹 빠져있었기 때문에 나의 하루 동선은 학교, 서예 수업, 동양화 수업, 데생화실, 집이었다. 광화문 화실에서 데생 연습을 하다 보면 늦은 밤이 되고 그땐 통금이 있어서 버스 타고 12시 전엔 집에 들어가야했다.
지루한 것이 싫은 난 긴 겨울방학에는 늘 뭔가를 해야 했기에 통기타 치기를 혼자서 배웠고, 음악과 미술, 완전 예능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사군자, 서예, 미술, 글쓰기대회가 있으면 꼭 상을 타온다. 다들 날 보러 ‘신사임당’이라고들 불렀다.
제일 싫어했던 바깥행사는 송충이 잡는 거였다. 털이 뽀송뽀송 난 송충이가 머리위나 어깨에 떨어지면 소리치며 온몸을 흔든다. 그래도 안 떨어진다. 한 반에 70명의 학생이 조그마한 콩나물교실에 들어가 종일 같은 자리에서 공부한다. 초와 걸레로 교실 바닥을 학생들이 닦아야 했고, 매일 청소 당번을 번갈아가며 시켜, 교실은 항상 반들반들했다.
학교앞 ‘하이드 파크’라는 컴컴한 음악다방에 들어가 당시 동양화과 학장이셨던 오당 안동숙 교수님께 보내는 장문을 쓰기 시작했다. 편지는 보냈으니 없고, 카피를 안 했으니 다시 읽을 수도 없고, 뭐라고 썼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
그 후 안 학장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휴강은 뜸해졌고, 교수들은 좀 긴장된 표정으로, 학생들은 활발한 수업을 할 수 있었다. 다방에서의 장문으로 적어도 과 수업 분위기는 내 마음에 맞는 대학교다운 ‘배움의 전당’으로 정리가 잘 된 셈이다.
거의 매일 데모와 휴강만 있었던 대학가 분위기에 학교 다니는 것에 대해 무의미해졌던 대학교 1학년 때다. 학교의 ‘놀자’판 분위기 속에서 뜻있는 일을 찾으려 했을 때 마침 한국유네스코학생협회, KUSA(Korea UNESCO Student Association)가 있다고 해 참여했다.
유진 협회과장을 만나러 명동 유네스코빌딩 사무실에 몇 번 간 일이 생각난다. 지도자양성교육도 받으며, 탈춤도 배우고 컴컴한 밤 그룹으로 산행하는 체험도 했다. 이대 축제 때는 밴드를 만들어 다른 학교에 다니는 쿠사 남학생을 죄다 초대해 이대 강당에서 통기타를 치고 탬버린을 흔들며 ‘캘리포니아 드림’을 불렀다.
학교 밖 사회 분위기로 공부를 못할 망정 우리 딴엔 의미 있는 학생 시절을 보내고자 했다. 얼굴도 이름도 다 잊은 22기 유네스코학생(쿠사 멤버)들 지금은 무엇을 할까? 40년 만에 함께 할 수 있는 모임이 있으면 이 뉴욕에서 서울로 달려가리라.
메릴랜드를 졸업한 뒤 뉴욕의 프렛 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울대 홍익대 미술대학원 졸업하고 온 남자 유학생이 여섯이나 있었고, 그중 내가 제일 어렸다. 마침 미술을 전공했으니, 주위가 모두 내 세상이였다. 주 중에는 수업과 스튜디오, 기숙사가 다 학교 안에 있어 학교 울타리 안에서만 내내 놀았고, 주말에 주로 놀러가는 곳은 소호와 이스트빌리지였다.
마침 뉴욕은 예술의 전성시대였다. 이때 내 청춘은 뉴욕에 첫발을 디뎠고, 뛰는 가슴으로 예술의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예술의 자유를 완전히 만끽한,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소중한 때였다. 뉴욕에 있는 모든 예술가의 뜨거운 열정에 묻혀 같이 불사르고, 같이 숨 쉬며, 미래엔 이런 진정한 예술세계가 없으리라 하며 1초를 놓칠세라 열성으로 지낸 날들이었다.
87년 가을, 뉴욕 시 역사상 시장실에서 일하는 첫 한국인으로 시청에 들어갔다. 직후 바로 서울에서 88올림픽이 있었고, 미국에 있는 교포들은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다. 88올림픽홍보로 서울에서 시장, 국회의원 등 수많은 공무원과 정치인들이 뉴욕 카치 시장을 나를 통해 찾았다.
91년엔 역사적인 남북한 UN 시대가 개막됐다. 뉴욕 유엔 건물 앞에 나란히 걸린 대한민국의 태극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공기. 각기 정부수립 43년 만에 평화공존의 틀에 들어온 남북한 UN 동시 가입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딘킨스 시장이 ‘뉴욕시 한국주간’을 선포했고 브로드웨이에서 열린 한인퍼레이드에 딘킨스 시장이 한복을 입게 하고 나도 바로 뒤에서 걸었다. 감회와 환호가 교차했던 유엔 총회장, 한국 국민, 세계에 뻗어있는 교민들 모두 한마음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유별나게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 협상을 잘 한 덕분에 내 닉네임이 ‘키신저 동생’으로 불리면서 1990년 말에는 키신저 어소시에이트에서 같이 일할 스텝으로 올 수 있냐고 조용한 러브콜이 와 며칠간 고민도 한 적이 있었다.
2005년 미국의 정·관·재·학·언론계 인사 1200명이 참석한 연례 만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관계에 매우 안정적이고 한미동맹은 더욱 건강하게 발전하고 있다고 했고,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동시가입을 지원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에게 한국 국민이 큰 박수를 보낸다며 밴 플리트 상과 컵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