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컷 ㉓ 박상우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나는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기간 사병으로 군대생활을 했는데 그곳에 배치된 1982년부터 나는 그곳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씨의 생도 시절에 대한 전설 같은 얘기를 많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박지만 씨도 1958년 개띠라 어린 시절부터 우리 세대는 루머와 팩트 사이를 오가는 그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아무튼 나는 육군 일병 시절에 첫 소설 습작을 시작하고 그것을 초고 삼아 부화시킨 600매 분량의 중편소설로 1988년 겨울에 작가로 등단했으니 군대 시절은 내 작가 탄생의 자궁과 같은 기억으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10월에 담임으로 부임할 때 내가 넘겨받은 학급에는 퇴학생이 13명이었고 학교 전체의 연간 퇴학생도 200명이 넘는다고 해서 경악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퇴학 사유는 대부분 가출. 봄과 가을이 되면 학생들이 떼를 지어 서울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사라지곤 했다. 한 학급에 결손 가정이 1/3이 넘는 학생들 앞에 서서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꾼다는 게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워 거의 날마다 술을 마시고 잠들던 기억이 난다.
3년 정도 세상 경험을 하고 작가로 등단해 다시 세상으로 나올 거라던 나의 애초 계획은 4년 8개월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성사되었다. 구원과 같은 당선통지 축전을 받아들고 이틀이 지난 뒤에 나는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고 무작정 전업 작가의 길로 나섰다. 사진에서는 앞줄 오른쪽에 안경 쓰고 있는 사람이다.
30대 중반이었던 저 시절이 내 문학 인생에서는 절정처럼 보이지만 나의 내면에서는 뒷날 겪게 될 무서운 창작의 고뇌가 자라나고 있었다. ‘아직 인생이 뭔지를 모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저 사진에 찍힌 저 시절, 저 웃음이 그런 걸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시절이 너무 그립고 간절하다.
시베리아의 5월과 6월, 눈 부신 햇살과 황금벌판을 이루던 아두반치키(민들레), 밤을 새워 달려도 끝나지 않던 자작나무 군락과 백야, 그리고 그때 만났던 소박했던 사람들이 어제의 기억처럼 여전히 나의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작가적 무지와 공부에 대한 갈망 때문에 글을 쓰는 게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이런 고통을 어떻게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가, 나는 밤낮으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뭔가 탈출할 명분이 절실하게 필요하던 그 순간, 너무나도 절묘하게 이상문학상이 나를 찾아왔다.
수상 이후 나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원고 청탁을 거절하고 창작 일선에서 의도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적 탐구의 시간, 요컨대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진짜 공부의 시간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공부의 과정에서 나는 소설보다 깊고 문학보다 높은 인생의 의미에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문학이 인생을 개간하는 ‘발판’이라는 걸 깨치고 내가 쓰는 소설이 한 자루의 호미와 같은 인생 탐구의 ‘도구’라는 걸 깨닫는 데 다시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주종관계였던 문학과 나의 오랜 관계를 청산하고 평생 고락을 함께 하는 동반관계로서의 문학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내 문학 인생의 커다란 분기점처럼 여겨지던 그 탐사에서 나는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삶의 뿌리가 끈질기게 뻗어 나가는 광경을 숱하게 접하며 망연자실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 상의 모든 사람에게 인생은 어차피 유랑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서도 믿음과 사랑과 배려가 깃든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눈물겹도록 핍진한 인생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반환점인 파키스탄 국경지대의 파미르 고원, 해발 3,600m의 카라쿨리 호수 앞에서 설산을 배경으로 찍은 저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더 높은 어디, 인생의 정점을 향한 내 의식의 지향성을 되새겨보곤 한다.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가건 인생은 인생이지만 무엇을 의식하고 무엇을 지향했느냐에 따라 인생의 의미는 이면적으로 완연히 달라진다.
내가 배운 인생, 내가 터득한 인생, 내가 지향하는 인생은 ‘주어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이다. 그것이 문학을 넘어 더 깊은 인생으로 들어가는 가장 온전한 삶의 자세라는 걸 가까스로 깨치게 된 때문이다. 표면적 삶의 미망에서 깨어났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