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문외한이 면세점 진출을 축하하며 지난 19일 찾아가자 고 대표는 맛보기로 핫초코(음료) 2가지, 초콜릿 3가지를 내왔다.
이 세 가지가 ‘카카오봄’ 초콜릿 음료의 기본이고, 그밖에 ▷휴식 같은 ▷흰 눈 같은 ▷알싸한 ▷실키한 ▷순수한 ▷깔끔한 ▷비체린 등이 더 있다. 비체린은 에스프레소 커피에 초코 크림을 섞은 이탈리아 전통 음료라고 한다.
함께 나온 핫초콜릿 리프는 초코 음료가 싱겁다고 느끼는 사람이 농도 높이려고 추가하는 나뭇잎 모양의 초콜릿 조각이다. 커피로 치면 샷 추가와 같다. 집으로 사 가서 음료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카카오봄’의 수익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다른 하나는 젤라토다. 신선하고 지방 함량이 낮은 이탈리아 전통 아이스크림이다. 홍대점에 2가지, 이태원점에는 6가지가 있다. 초콜릿과 우유가 기본이고 계절별로 딸기·오미자·팥·고구마·무화과·녹차 등 시즌 메뉴가 돌아간다. 두 기둥은 계절 따라 상호보완적 관계여서 여름에는 젤라토가 많이 팔리는 이태원점, 겨울에는 초콜릿이 주력인 홍대점 매출이 높다고 한다.
고 대표를 알기는 몇 년 됐지만, 수제 초콜릿 제품을 먹어보기는 처음이다. 몇 가지 먹어보니 초콜릿의 세계를 모르던 나에겐 미각의 별세계였다. 단것을 싫어해 초콜릿이라면 막연히 ‘너무 달 거야’ 하며 멀리했는데 굳이 그럴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한 것이 많았다. 질문이 이어졌다. 내용도 문답으로 정리한다.
- 맛있는 초콜릿이라면 어떤 것인가.
“우선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다. 둘째는 좋은 재료로 잘 만든 것이다. 특히 원료인 카카오 품질이 중요하다. 카카오 품질은 품종·원산지·재배방법과 발효·건조·볶기 등 관리·가공기술의 총체적 결과다. 전 과정이 농사와 같고, 장 담그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어느 한 곳만 삐끗해도 좋은 물건이 안 나온다. 원료인 ‘커버추어’는 녹여 쓸 수 있게 큰 용량으로 나온다. 원산지·제조원·함량 등을 가려서 수입한다. 그걸 녹여서 다양한 재료와 배합해 제품을 만든다.”
- 이름을 ‘카카오봄’이라 한 이유는.
“카카오나무라는 말이다. 내가 늙으면 이 나무가 자라서 여러 사람이 기대고 그늘에서 휴식할 수 있는 큰 나무가 되길 비는 염원을 담았다. 문익점(1329~1398)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간 귀양살이를 한 끝에 반출이 금지된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고려로 돌아왔다. 그 목화가 우리 선조들의 삶을 따뜻하게 해줬다. 벨기에에서 초콜릿을 배울 때 학교에 동양 국적자는 처음이라고 했다. 초콜릿 문화와 기술을 남몰래 배워서 내 마음의 붓두껍에 간직해 들어왔으니 목화처럼 잘 자라고 사람들에게 안온한 휴식이 되길 바라면서 이름을 지었다. 잠깐씩이라도 누구에게나 달콤한 휴식이 있는 공간을 꿈꾼다.”
- 제품이 엄청 많은데 몇 가지인가. 대표적 제품을 소개해 달라.
“초콜릿 제품은 계절에 따라 약간 변동이 있지만 60가지 내외다. 나왔다가 팔리지 않아 없앤 것도 많고, 디자인을 끝냈지만 제품으로 내놓지 않은 것도 많다. 없애지 않고 진열장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카카오봄’의 대표 제품이다. 다 만든 이유가 있고 담은 이미지가 있다. 제품마다 왜 만들었는지 다 설명할 수 있다. 소비자가 받아들이는 맛은 가지각색이겠지만 내게는 열 손가락 중 하나다. 모두가 생명이 있고, 맛의 디자인이 독창적이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 특별한 사연이 있는 제품이 있다면.
“‘꿀색’이라는 초콜릿이다. 벨기에에 유명한 만화가 겸 애니메이션 감독 융 에넹(Jung Henin·53)이 있다. 한국 이름은 전정식이다. 융은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영어식으로 Jung으로 표기하고 현지어로 읽은 음이다. 입양인인 그는 2013년 11월 자신이 만든 자전 애니메이션 영화를 가지고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참여했다. 프랑스어로 된 영화 제목은 '피부색: 꿀(Couleur de peau: Miel)’이다. 입양 카드에 적힌 말이다. 동양인 피부색을 그렇게 표현한 듯하다. 그는 다섯 살이던 1970년 남대문시장에서 엄마를 잃고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겨져 벨기에로 입양됐다. 많은 입양인처럼 그의 성장기도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만화가로 성공해 고국을 찾았다. 영화가 아름다웠다. 음악도, 그림도 좋았다. 스토리는 관조적인데 슬프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아 울림이 더 컸다. 벨기에 초콜릿을 배워온 사람으로서 그를 위해 웰컴 초콜릿을 만들고 싶었다. 그의 만화 주인공은 까까머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우산을 들고 있다. 검정 고무신은 한국에 살 때 기억이고 우산은 늘 그리운 어머니의 품인 듯했다. 그의 고단했을 지난 시간을 위로하고 고국에 온 것을 환영하는 뜻을 담은 초콜릿을 디자인해 만들어서 부천으로 찾아갔다. 초콜릿을 선물로 건네면서 담은 뜻을 설명하자 그의 눈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후 그가 한국에 올 때마다 만났고 선물로 그 초콜릿을 전했다.”
- 대학은 농학과를 나왔던데.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 시골은 전혀 몰랐다. 자연과 벗 삼아 살려면 농촌에 도움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천여고) 건국대에 찾아가 축산대학 이름 새긴 비석 아래 학교반지(교표를 새긴 기념반지)를 묻으며 다짐했다. 반드시 축산학과 학생이 돼서 이 반지를 찾아 끼겠다고. 그랬는데 점수가 모자라 농학과에 가게 됐다(86학번). 묻어둔 반지는 찾아서 교내 일감호에 던졌다. 아버지에게는 ‘농학박사가 돼서 농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매일 막걸리 자리에 끼거나 데모하며 세월을 보냈다. (※’10·28 건대 항쟁’이 1986년 일이다.) 논밭과 과수원이 있는 학교 안 농장에서 몸으로 하는 실습은 재미있었다. 생리학·병리학 등 학문적으로 하는 과목은 졸렸다. 졸업하면서 ‘나는 앉아서 공부할 사람이 아니다’고 판단하고 박사 꿈은 접었다. 진로를 고민하다가 아이들과 노는 게 좋고 소질도 있는 것 같아 공부를 다시 하기로 했다. 체력장 보고 대입 준비를 하던 중 결혼을 먼저 하게 됐다. 대학 졸업한 해 연말이었다. 부산에서 2년 가까이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했다. 제대로 해보려고 1992년 방송대학 교육학과 3학년에 편입해 유치원 교사 자격을 취득했다. 유치원에 부임해 6개월을 근무하기도 했다. 현실은 너무 척박했다. 무엇보다 박봉이었다. 부조리하다고 느꼈다. 1994년 온 가족이 벨기에로 유학을 갔다. 7년을 체류하며 가르치고 배웠다. 우선 현지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려고 언어를 배웠다. 교육학 중 교수법을 전공하려 했다. 생활을 위해 한글학교 선생님으로 나갔다. 한국 외교관이나 주재원 자녀에게 한국말로 수학을 가르쳤다.”
- 진로를 바꾼 이유는.
“학업 준비를 하다가 나이 서른이 넘어가자 대학원엘 꼭 가야 하나, 늦지 않았나 회의가 생겼다. 학위 받고 귀국하면 마흔 살은 될 텐데 한국에 일자리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학문의 길은 답이 아니었다. 평생직업과 현실 문제를 두고 방황하고 갈등하다가 구체적인 일에 대해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미술·도자기·인형극·요리 학교에 다녔다. 배우면서 미래의 직업과 연결해보려 했지만 마음에 꽂히는 게 없었다.”
- 초콜릿도 그 여러 가지 중 하나인가.
“처음 시작은 그랬다. 방황의 여로에서 2009년 9월 다른 학교에 또 들어갔다(그곳은 가을에 학년 시작). 벨기에 안트베르펜(Antwerpn)에 있는 PIVA호텔학교였다. 초콜릿 전문과정 두 학기를 마쳤다. 배우면서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고, 소질이 있을 것 같아서 이것저것 바꿔가며 배웠는데, 초콜릿에 입문한 다음에는 바꿀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배운 것이 모두 초콜릿 만드는 일에 쓰임새가 있어 헛공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통 초콜릿을 처음 만나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1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했다. 가르치는 대로 만들기는 했지만 깊은 뜻까지 알지는 못했다. 그렇게 만든 초콜릿을 주변에 선물하면 마음이 즐거웠다. 맛있다고 하면 기뻐서 자꾸 주고 싶어졌다. 자꾸 주고 싶어서 만들다 보니 익숙해지고 뭔가 있구나! 생각이 들면서 초콜릿의 세계로 들어가는 실마리를 찾았다.”
- 초콜릿을 언제 제대로 알게 됐나.
“본질을 깨우치기는 귀국해서 직업으로 종사하면서다. 저절로 터득했다. 직업으로서는 힘들지만, 초콜릿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재료이고, 기호식품이며, 그것 자체가 문화라는 깨달음을 체험을 통해 얻었다. 잘 모르면서 가르치는 대로 만들고 배웠지만 선진국에서 오래 축적된 문화의 가치를 제대로 배웠구나, 귀한 걸 잘 배웠구나 깨달았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본질을 터득할 수 있는 곳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첫 걸음을 좋은 선생님에게 배워야 한다는 걸 시간이 갈수록 절감한다. 이탈리아 젤라토를 배울 때 선생님을 특히 잘 만났다. 교재가 아니라 진짜 배운 게 따로 있다. 아이스크림은 무엇인가. 어떤 아이스크림을 추구하는가.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배움이었다.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깃든 정신에 감동했고, 그것만 기억한다. 기술은 반복하고 연습하면 몸이 기억한다. 기술에 깃든 정신은 마음이 감화돼야 내 것이 된다. 선생님이라고 누구나 감화를 주지는 못한다. 나는 선생님을 잘 만나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했다. 아이스크림 기술을 배우러 갔다가 ‘초콜릿과 같은 세계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기술을 익히기 위한 반복과 훈련은 혼자 하는 것이다. 그 전에 본질과 정신을 머리와 가슴에 담고 시작하면 진전이 빠르다.”
- 초콜릿의 본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건축가에 비유할 수 있다. 건축가마다 집을 짓는 철학과 정신이 있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이 건축 작업에 반영되고 결과물로 나타나야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다. 만든 사람이 생각하고 말한 것에 부합하게 만들어야 가치 있는 제품이다. 기술은 정신이 담긴 본질과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먼저 본질을 터득해야 기술로 움직이는 행위의 이유와 쓰임을 알 수 있다. 초콜릿은 휴식과 위안의 음식이고 문화이므로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 그걸 충족하지 않고 솜씨만으로 맛과 모양을 내면 제대로 된 초콜릿이 나오지 않는다.”
- ‘카카오봄’은 언제 설립했나.
“PIVA에서 초콜릿 과정을 마치고 아이스크림 전문과정을 6개월 더 배워 2001년 초여름 귀국했다. 돌아와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 베이커리 초콜릿 담당으로 21개월을 일했다. 2003년 9월 1일 정통 수제 초콜릿 전문기업 ‘(주)카카오봄'을 설립하고 서교동 잔다리로에 가게를 열었다. 3년 후 현 위치로 이전해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 귀국한 뒤로도 시간을 내 프랑스·이태리·스위스·영국·페루 등 초콜릿 강국을 찾아다니며 배웠다. 벨기에에서 공부한 걸 바탕에 두고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하는지 보려고 공부를 계속한다. 처음 7~8년은 회사를 제조업으로 등록하고 운영했다. 호텔이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 제품을 많이 납품했다. 일을 어마어마하게 했다. 벌어서 카카오봄 카페의 적자를 메웠다. 카페에서 판매는 굴곡이 심했다. 밸런타인데이, 빼빼로데이, 수능 직전 등 특별한 날에만 많이 팔리고 평소에는 거의 안 나갔다. 초창기에는 1년 매출의 40% 정도가 밸런타인데이에 팔렸다. 그나마 단골이 어느 정도 생겨서 점포를 유지한다.”
- 요즘은 달라졌나.
“제조업은 접었다. 초콜릿 공장들과 가격경쟁이 불가능하다. 입찰 시장에서 승률이 0에 가깝다. 수제 초콜릿과는 맞지 않아 포기하고 현재는 매장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대신 쇼콜라티에 경력 17년 동안 쌓은 노하우로 제품개발 협업을 많이 한다. 이것도 가르치는 일의 일종이다. 오리온, 제주도 목장과 업체, 개인 농장 등이 제품을 개발하는 데 참여했다. 내가 알려줬으니 내 제품이라고 생각해 사후관리도 꾸준히 한다. 한번 알려준다고 다 알 수는 없다. 오래 일한 내가 계속 설명하면 가치를 알고 생각을 바꿔 잘 활용한다. 흔히 이런 일을 컨설팅이라 하지만 그 말을 싫어해 협업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나라 초콜릿 역사는 짧다. 고종 황제 아관파천 때 음식 시중을 든 독일계 러시아인 여성 통역사 앙투아네트 손탁(1854~1925)이 초콜릿을 진상한 게 처음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일반인이 알게 된 것은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통해서다. 국산 제품은 40년 전인 1968년 해태제과·동양제과에서 처음 나왔다. 4년 뒤 동양제과에서 ‘초코파이’를 출시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뒤에 한국인 쇼콜라티에가 처음 탄생하고 제대로 된 수제 초콜릿을 얘기하게 됐다.
- 공항 면세점까지 진출했는데.
“파격적 대우를 받았지만 우선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주장도 할 수 있고 인정도 받을 수 있다. 유·무형의 압력과 견제가 있고, 있을 것으로 안다. 긴장된다. 외국인들이 우리 초콜릿 사 가서 먹어보고 좋다고 하면, 초콜릿 잘하는 나라는 다 문화선진국이니까, 한국의 이미지도 그만큼 좋아진다. 그렇게 되면 초콜릿도 국가를 대표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 책임도 무겁다. 벨기에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이 한국에 와서 먹어보고는 ‘벨기에보다 더 맛있다. 전통을 지키면서 우리보다 더 정성스럽다’며 놀란다. 손재주 좋은 한국 사람이 초콜릿 맛을 충실히 이해하고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는 역량을 평가해주는 것 같다. 벨기에 사람이 된장·고추장을 한국에서 배워 한국 사람보다 더 잘 담근다는 얘기와 같은 것 아닌가.”
- 명절까지 쉬지 않고 문을 여는 이유는. 계속 그렇게 하는가.
“벨기에 살면서 가장 외로운 때가 그곳 사람들 명절이었다. 그들은 가족·친척끼리 모여 맛있는 음식 먹으며 즐기고 상가는 철시한다. 그런 날은 정말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절실하게 외로웠던 경험 때문에 휴식 서비스 공간인 초콜릿 카페를 시작할 때 쉬지 않기로 했다. 홍익대 주변은 명절에도 학생이나 외국인들이 많다. 힘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게 초콜릿이다. 본질에 맞게 명절에도 열어왔다. 최근에는 변화 요인이 생겼다. 최저임금 오르고, 임대료도 오르고, 매출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가게 운영 15년 동안 최근 2~3년처럼 경영압박을 느낀 적이 없다. 사면초가, 경기가 안 좋다는 말이 실감 난다. 가게 시작할 때 생각과 정신은 바뀌지 않았지만 현실의 무게는 점점 버겁다. 마음이라도 열심히 재미있게 10여 년 해왔는데 요즘은 긴박감이 흐른다. 예전에는 아침 9시에 열었다. 이 동네서 가장 일찍 여는 가게였다. 3년 전부터 비용 줄여보려고 11시로 늦췄다. 이제 매주 하루는 쉴까 고민 중이다. 그러면 인건비가 줄지만 매출도 준다. 어느 쪽이 나을지 정말 딜레마다. 절약해서 버틸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섰다. 위협을 느낀다. 조만간 결단해야 한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결정하겠다는 방향만 정했다.”
- 희망적인 소식은 없나.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더 힘이 빠지는 일은 있다. 현실이 어려워지니까 초콜릿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유할 수가 없다. 비전을 제시하기 어렵다. 내 비전은 분명하지만 젊은이들 사기를 북돋울 당근이 떨어졌다. 밸런타인데이에 외국에서 왕창 들여와 확 뿌려서 1년을 먹고 산다는 상혼이 기승을 부리는 시장에서 수제 초콜릿으로 큰돈을 벌 수는 없다. 투기하듯 수제 초콜릿을 할 수는 없다. 초콜릿을 가지고 음식, 기호식품, 정신, 문화, 이런 걸 추구하면서도 망하지 않았으니 거기서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