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번 두드리면 칡뿌리도 붓 되죠” 40년 붓쟁이가 그은 인생의 한 획

중앙일보

입력 2018.01.19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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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충북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의 한 붓공방. 9.9㎡(3평) 남짓의 방 안에 들어서자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붓이 벽에 걸려있었다. 황토 옷을 입은 붓대 뭉치가 화로 앞에 놓여있고, 작업에 쓰인 밀랍 덩어리와 밀판도 보였다. 방 한편에선 ‘붓쟁이’ 유필무(58)씨가 붓털을 한 움큼 쥐고 빗질을 하고 있었다. 뻣뻣한 털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야 붓털이 부드럽고 획이 올곧게 나온다고 한다.
 
유씨는 “털이 아깝다고 버리지 못하면 불필요한 것들이 계속 남아 썼을 때 획이 고르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작업을 붓털(초가리)을 고르는 ‘물끝보기’라고 소개했다. 털끝을 물에 적셔서 빗질하고 대나무 칼로 한올 한올 털을 선별한다. 붓이 완성되는 50여 가지 공정 중의 하나다.

충북무형문화재 유필무 필장
등나무·칡 등 식물 섬유질 붓 제작
“흔한 재료도 정성 더하면 귀해져”
값싼 중국산 붓에 판매량 줄었지만
옛 방식의 붓 제조가 살길이라 생각

충북 증평군 도안면의 붓공방에서 유필무 필장이 어린 말꼬리 털로 만든 목탁붓과 칡줄기를 수천번 두드려 만든 칡붓을 소개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유씨는 최근 충북무형문화재 필장(筆匠)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필장은 붓을 만드는 장인이다. 초가리라 불리는 붓털부터 붓대와 각통, 붓뚜껑, 붓꼭지까지 유씨의 손끝에서 작업이 이뤄진다. 붓대에는 전통문양과 글을 새기고 옻칠도 세 번 한다. 충북도 문화재위원회는 “유씨가 전통 붓 제작 방법을 전승하고 또 계승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유씨가 붓과 인연을 맺은 건 41년 전이다. 열여섯 살이던 1976년 서울의 ‘예문당’에서 운영했던 붓공방에서 처음 붓 만드는 법을 배웠다. 88년 충북 음성에 셋방을 얻고 나서는 혼자서 붓제작 기법을 연구하고 구전해온 옛 방식을 복원했다.
 
그는 “값싼 중국산 붓이 밀려오면서 판매량이 급감했지만 이왕 붓 매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옛 방식의 붓을 만드는 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유씨가 지금까지 만든 붓 종류는 100가지가 넘는다. 양털이나 족제비 꼬리, 노루 앞가슴 털 등 다양하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서예용 붓은 대개 양의 털로 만든 모필(毛筆) 등 동물의 털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유씨가 붓 장인으로 세상에 알려진 건 그가 만든 갈필(葛筆·칡붓) 덕분이다. 칡 뿌리와 줄기를 5000~1만번까지 곱게 쳐서 붓털로 만든 것을 하나의 붓으로 만드는 데 3개월이 걸린다. 이 외에도 등나무·억새·질경이·볏짚·띠풀 등 다양한 식물 섬유질을 활용해 붓을 만들었다.
 
그는 ‘나만의 붓을 만들자’고 생각한 뒤 시행착오를 거쳐 96년 갈필을 완성했다.
 
칡 붓을 만드는 데는 3~5년생 칡 줄기를 사용한다. 칡에는 녹말과 기름이 뒤섞여 있다. 이 성분을 뽑아내기 위해 소금물에 찌고 건조하기를 9번씩 반복한다. 반쯤 말린 칡 줄기를 망치로 달래듯 5000번 이상 두드린다. 3개월 동안 이 작업을 마치면 칡 줄기가 잔털처럼 연해진다고 한다.
 
유씨는 “붓을 매면서 흔한 재료라도 많은 손길과 노력이 더해지면 더 귀한 존재가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증평군은 유씨가 사는 도안면 화성리에 선비와 전통 붓을 주제로 한 붓마을을 조성할 계획이다. 
 
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