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월은 맞춤양복 시장의 비수기다. 추위로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지 않는 데다 이젠 더 이상 졸업·입학 시즌에 양복을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식이 많은 봄, 가을이 그나마 맞춤양복점이 바빠지는 시기다. 하지만 지난 1월 12일 찾은 비스포크 양복점 ‘레리치’의 직원들은 계절을 잊은 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국내 패션 시장이 모두 힘들다는데 이곳만 예외인 건가 의문이 드는 순간, 직원이 “주문양이 많기도 하지만 한 벌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잠시도 쉴 틈이 없다”고 설명했다.
방문만 4차례, 제작기간 두세 달
접착제 없이 장인이 한 땀 한 땀
값은 다소 비싸 … 200만~1000만원
개성·취향의 시대와 맞아떨어져
국내에 양복점이 들어온 지도 100년이 훌쩍 넘었다. 한국인이 처음 만든 양복점으로 알려진 1903년 ‘한흥양복점’을 시작으로, 대를 이어 지금도 운영 중인 ‘종로양복점’, 재벌가 회장님들의 단골 양복점으로 소문난 ‘장미라사’ 등 70년대까지 종로, 중구 소공동을 중심으로 많은 맞춤양복점이 생겨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기성복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서 맞춤양복 시장은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2010년부터 전문매장 늘어나
이렇게 부활한 맞춤양복 시장은 최근 들어 더 고급화됐다. 저가형 맞춤양복을 입어본 경험으로 눈높이가 높아진 데다, 브랜드의 이름값보다 개성 있는 디자인과 잘 만든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트렌드가 합쳐졌기 때문이다. 그냥 ‘맞춤’이 아니라 장인이 ‘제대로 만든’ 고급 맞춤복인 비스포크에 주목하는 이유다.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 소장(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은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를 소유하면서 느끼던 만족감을 이제는 자신만의 취향과 가치가 담긴 옷에서 찾는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30~40대 젊은 사장들이 맞춤양복 시장에 뛰어들면서 젊은 감각을 더하고 유럽의 양복 기술과 소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도 도움이 됐다. 레리치의 김대철(43) 대표는 "고객의 취향이 점점 더 고급화되고 있다”며 "이에 맞춰 올봄 심지·패드 등 부자재를 정통 이탈리아 공방 스타일로 전부 교체하고 만드는 방식 또한 더 세심한 손바느질 기법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럽 양복 기술·소재 적극 도입
가장 큰 매력은 앞서 말한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란 점이다. 여기에는 세상에서 하나뿐이라는 희소성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다. 굽은 등, 유달리 좁은 어깨 등 체형의 결함을 잘 감출 수 있는 것은 기본. 팔을 앞으로 뺀 채 오래 컴퓨터 작업을 하는 등 움직임이 다른 직업적 특성에 따라서도 옷을 달리 만든다.
‘나를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옷’이란 점도 매력적이다. 한남동 맞춤양복점 ‘테일러블’의 곽호빈(32) 대표는 "영국엔 비스포크 테일러를 찾아 상담하는 건 내 옷장 컨설팅을 받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며 "나를 가장 돋보이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옷감과 색, 디자인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50년 경력의 장한종(73) 레리치 마스터 테일러는 비스포크 양복을 "입는 이의 가장 멋있는 모습을 끌어낼 수 있는 도구”라고 했다. 입는 사람의 얼굴이 가장 돋보이는 형태를 잡기 위해서는 정교하고 세심한 가봉과 봉제 과정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한 땀씩 손으로 작업하는 비스포크 방식이 가장 적합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어 "접착제나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니 옷이 부드럽고 입체감 또한 자연스럽게 살아난다”며 "이렇게 만든 옷은 10년이 지나도 실루엣이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