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3>
유럽전구 사령관 아이젠하워도 쑨리런을 높이 평가했다. 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쑨리런을 초청했다. 목적은 중요 전장(戰場) 참관이었다. 장제스가 쑨리런에게 한마디 던졌다. “너는 초청하고, 나는 초청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 쑨리런은 아이젠하워와 패튼, 드골 등의 환대를 받았다. 패튼과 함께한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한참 들여다보던 장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맥아더 “도울 테니 대만 맡아 달라”
쑨리런 “내 충성 대상은 장제스뿐”
장제스는 쑨리런이 불안했지만
육군·교육·방위사령관 겸직시켜
간첩사건 나자 쑨리런 엮어 버려
쑨리런을 만난 맥아더는 묘한 말을 했다. “우리는 대만이라는 항공모함이 공산당 수중에 떨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귀하가 대만을 공고히 할 뜻이 있다면, 미국은 전력을 다해 장군을 지지하겠다.” 지원 내역과 액수까지 제시했다고 한다.
쑨리런은 장제스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요청했다. “나의 충성 대상은 장제스뿐이다. 어려움에 처한 영수에게 등을 보일 수 없다. 현재 타이페이(臺北)에 주둔 중인 천청(陳誠·진성)도 장제스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복종한다. 나는 전쟁은 할 줄 알아도 정치는 모른다. 반공(反共)을 영도할 능력이 없다.” 대만으로 돌아온 쑨리런은 천청을 찾아갔다. 장제스에게 전해 달라며 맥아더가 한 말을 털어놨다.
천청의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쑨리런의 충성에 탄복하지 않았다. 도리어 불안해 했다. 쑨리런을 당장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미국 눈치 보느라 그러지도 못했다. 쑨리런은 쑨리런대로 미국에 불만이 많았다. 대만 주재 미국 외교관 만날 때마다 “천청이 내가 미국과 가깝다는 소문내는 바람에 되는 일이 없다. 직위만 있고 실권은 없는 자리에만 있다 보니 짜증이 난다”며 불평을 늘어놨다. 어찌나 심했던지, 미국 공사가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전문으로 보고할 정도였다.
미국이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장제스는 쑨리런에게 육군사령관, 교육사령관, 대만 방위사령관을 겸직시켰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미래의 3군 총참모장이었다. 장제스의 후계자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떠돌았다. 미국도 쑨리런의 발탁을 환영했다.
쑨리런이 군의 요직을 맡음과 동시에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정보원들을 육군 사령부에 침투시켰다. 1주일 만에 쑨리런의 예쁜 여비서 두 명을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했다. 측근들도 줄줄이 간첩죄로 구속됐다. 1950년 3월 말에 벌어진 일이었다.
3개월 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에겐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었다. 미 7함대가 대만 해협을 에워쌌다. 안정이 보장된 장제스는 콜라 거품 들이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과 직접 상대했다. 쑨리런의 역할이 줄어들자 육군 총사령부에 정치부를 신설하고 장징궈를 정식으로 파견했다. 정치부는 사령관의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쑨리런은 유명무실한 사령관으로 전락했다.
이런 쑨리런을 아무도 싸고돌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1950년대, 대만은 법치 형식의 전제주의 사회였다. 인간관계가 미묘하고 복잡했다. 미국식 교육받은 쑨리런이 적응하기엔 버거웠다.
성격도 문제가 있었다. 미국 대사의 평가를 소개한다. “쑨리런은 근신을 할 줄 몰랐다. 우쭐대기 좋아하고 유치한 구석이 많았다. 고급 군사회의에 장제스보다 늦게 참석하곤 했다. 총참모장에게 경례하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총통이 있으면 다른 상급자에게 경례할 필요가 없었다.”
명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쑨리런은 권위주의 시대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유일한 고관이었다. 공개석상에서 군대의 국가화를 주장하곤 했다. 장제스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였다. 볼 때마다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지만 허사였다. 언젠가 장제스의 칼날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구웨이쥔의 예상은 적중했다.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간첩사건이 발생하자, 쑨리런을 함께 엮어 버렸다.<계속>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