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원의 포토버킷(12)
카지노딜러 하면 오래전 유행했던 TV 드라마를 떠올리며 드라마 ‘올인’의 송혜교를 떠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냥 서서 손님들에게 카드를 나눠 주고 칩을 회수하는 직업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LOY문화예술실용전문학교 카지노딜러학과 고주선 교수
"카드 대신 학생들에게 꿈 나눠주는 드림딜러가 내 직업"
고 교수에게 지금처럼 카지노딜러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던 시절에 어떻게 직업으로 딜러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첫직장은 전문대학 교직원
학교를 졸업하기 전인 2000년 말 워커힐 카지노의 딜러 모집에 지원해 합격한 뒤 6개월간의 훈련을 거쳐 꿈에 그리던 카지노딜러가 되었다. 잠재돼 있던 열정과 서비스마인드에 학습이 더해져 전문적인 딜러가 돼 가는 과정이 행복했다.
고 교수는 1년여 기간 동안 현장 딜러로 근무하면서 카드·주사위·칩 등을 딜링하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서비스마인드와 매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딜러는 우선 게임규칙을 꿰뚫고 있으면서 고객에게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하고, 고객이 기분 좋게 게임을 즐기게 전체 흐름을 리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카지노의 직원으로 회사가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니까 고도의 집중력도 필요하지요. 겉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업무 강도가 높은 직업입니다.”
마침 세종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시간강사로 카지노 실무와 카지노 서비스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생긴 고 교수는 ‘고객서비스(C/S : Customer Service) 강사양성 아카데미’까지 수료해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카지노 딜러 출신이라는 경력에다 경험을 살린 재미있고 열정적인 강의 덕분에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2005년 7월 한국관광공사의 자회사인 그랜드코리아레저(GKL)의 카지노설립추진단에 합류해 ‘세븐럭카지노’ 설립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딜러와 C/S 강사로 활동하며 실무와 이론 경험을 함께 다진 덕분이었다. 이후 GKL에서 딜링 교재를 제작하고 서비스 교육을 담당하며 딜러로서도 큰 활약을 했다.
이후 고 교수는 육아를 위해 몇 년간 현장을 떠났다가 2017년 가을 첫 직장인 워커힐카지노에 딜러로 복귀했고, 그녀의 경력과 열정을 눈여겨 본 상사의 소개를 통해 LOY문화예술실용전문학교 카지노학과 전임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틈틈이 카지노딜러의 세계, 전문직업정신 등에 대해 강의를 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하지 않고 수락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최근 사회 초년생들에게 ‘꿈과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경험을 살려 누군가의 꿈을 옆에서 돕는 것이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라고 느꼈지요. 그러던 참에 교수 제안이 와서 기뻤습니다. 강의할 때 저를 ‘드림딜러(Dream Dealer)’로 소개한 적이 있는데, 진짜 드림딜러가 된 기분입니다. 이제는 카드 대신에 꿈을 나눠 줘야지요!”
고객들에게 카드를 나눠주는 카지노딜러와 후배들에게 직업정신을 전수해 주는 강사로 활약하다가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꿈을 나눠주고 훈련을 시켜야 하는 ‘드림딜러’로 변신한 고 교수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질문했다.
“새로운 기대감으로 두근거리기도 하지만 한편 무거운 책임감도 느낍니다. 현장에서 딜러로 활동하고 후배들을 교육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많았거든요. 카지노학과를 졸업했다는데, 거의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입사 후 몇 개월간 훈련과정을 따로 거친 후라도 고객들 앞 테이블에 설 수 있는 경우는 그래도 다행입니다. 흔한 말로 견적이 안 나오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딜러는 실력보다 직업정신이 중요”
“학교에서 실질적인 직업교육과 훈련기회를 제공하면 회사에서는 재교육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LOY문화예술실용전문학교 출신은 바로 게임 테이블에 세울 수 있을 만큼 실력도 좋고 인성 또한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게 첫 번째 목표입니다. 출근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LOY문화예술실용전문학교가 학생들에게는 좋고 교수들에게는 아주 힘든, 바람직한 모습을 제대로 갖춘 학교라고 느껴져 기대가 큽니다.”
학교 교직원에서 딜러로, 딜러에서 교수로 어찌 보면 쉽지 않은 변신을 거듭하며 새로운 꿈에 도전해온 고 교수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현재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혹시 모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배우며 준비했지요. 교직원 시절엔 새벽에는 영어학원을, 저녁에는 전문대학교에 다녔습니다. 딜러로 일하면서도 C/S 강사학원에 다녔습니다. 육아 중에도 강의기회가 생기면 마다치 않고 먼 거리라도 달려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지금 조금 더 힘들게 뛰어 두면 나중에 조금 더 편하게 걸을 수 있더라고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문득 고 교수의 남편에 대해 궁금해졌다. 남편의 이해와 협조가 없다면 쉽지 않았을 과정이라 생각되어 물었다. 한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기 시작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보여준 모습 중 가장 신이 난 얼굴이었다.
“현재 GKL 일본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태권도 일본국가대표 코치로 올림픽 메달도 땄고요.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잘 이해해준 면도 있지만, 저의 꿈에 관해 자주 물어봐 줍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한참 동안 열변을 토하는데 다 들어주고 기억했다가 응원하고 도와줍니다. 남편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거예요.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고주선 교수와 남편 조창용 씨(45)는 처음 만난 날로부터 100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고, 프러포즈도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안에서 했다고 한다. 출발부터 남달랐던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만들어갈 하프타임 이후의 후반전 인생이 궁금하다.
이상원 밤비노컴퍼니 대표·『몸이 전부다』저자 jycys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