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14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물고문해 죽게 한 경찰관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뒤 억울한 심정으로 밤새도록 찬송가를 불렀다. 그는 절대자가 젊은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도 생각했을까. 추웠던 78년 겨울 대학 2학년인 나를 다뤘던 3인조 중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휴식 시간’에 담배를 권하면서 “고등학생 아들이 공부 잘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너를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어 버릴 수 있어”라고 협박했던 악마의 눈에 담긴 아비의 깊은 사랑을 봤다.
1987년 검사·의사 기득권 버리고
학생·시민·기자는 치열했는데
전리품 거저 챙긴 정치는 뭘 했나
이대론 다음 분노의 대상이 될 것
최환은 평소 학생과 재야인사를 무더기로 구속해 악명 높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부모가 서울대생 아들을 얼굴도 못 보고 8시간 만에 화장하느냐”라고 정색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권력의 개’가 아닌 양심의 편에 선 것이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이 “무력으로라도 부검을 막겠다”고 했지만 “시신을 인도하지 않으면 특수 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당신을 체포하러 가겠다”고 맞섰다. 서슬 퍼런 강민창도 꼬리를 내렸다.
공은 황적준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압박에도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목이 욕조 턱에 눌려 숨 막혀 죽음)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의사로서의 양심이자 직업윤리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 황적준은 경찰 수뇌부의 회유 과정이 담긴 일기장이 언론에 공개된 뒤 국과수에 사표를 냈다.
다른 사람들도 사건의 전모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박종철군 사망 사실을 최초로 보도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 고문치사가 단순 쇼크사로 은폐·축소됐다는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황호택·윤상삼 기자, 경찰의 사건 은폐·축소 시도를 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에게 제보하고 이런 사실을 기록한 그의 ‘비둘기’(옥중서신)를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전달한 영등포교도소 전·현직 교도관들, 이부영의 메모를 전달받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한 김정남, 이를 폭로한 김승훈 신부가 그들이다. 그러나 결정타를 날린 것은 전 국민적 분노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 강도는 체제 변화의 요건인 최소임계질량(minimum critical mass)을 넘어선 상태였다.
우리는 시민의 힘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1987년 체제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영화가 보여 준 대로 새로운 시대는 결코 저절로 열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닌 것이다. 분명한 것은 87년의 주역은 학생과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학생, 권력과 맞섰던 검사와 의사, “독재 타도”를 외친 넥타이부대 시민의 열망이 이끌어 낸 승리의 전리품을 챙겼을 뿐이다. 2017년 ‘촛불’의 주역도 정치는 아니었다.
민주화 30년, 이제 정치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달콤한 특권에 취해 민심을 읽지 못하고 분권과 협치, 미래의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다음 분노의 대상은 낡고 무능한 정치가 될 것이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