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이론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박사가 1945년에 쓴 일기에서 이른바 ‘F연구’로 불리던 원폭 연구 관련 기록이 나왔다고 아사히신문이 22일 보도했다.
F연구는 1943년 5월 일본 해군이 당시 교토제국대학에 의뢰한 비밀 프로젝트다. F는 ‘핵분열(fission)’을 뜻한다. 해군과 별도로 육군도 도쿄의 이화학연구소와 함께 ‘이호(二号)연구’라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日 최초 노벨상 받은 물리학자 유카타 박사
"F연구 협의회 나갔다"…해군과 수차례 접촉
유카와 박사가 직접 핵분열 연쇄반응 설명
육군도 이화학연구소 통해 핵무기 개발 시도
결국 우라늄 못 구해 패망 직전 사실상 포기
유카와 박사는 자신의 일기에서 “F연구 협의회에 참석했다”고 4차례 썼다. 구체적인 시간·장소도 명기했다. 모임은 1945년 2~7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 공교롭게도 일본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던 시기와 겹친다.
일기에 따르면 그해 7월 21일 오쓰시의 비와호호텔에서 해군과 교토대 연구진이 긴급회의도 가졌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하기 불과 보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날 양측은 사실상 원폭 개발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원료인 우라늄 획득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육군의 의뢰를 받은 이화학연구소가 전쟁 막바지 미군의 공습을 피해 함경남도 흥남으로 옮겨 연구를 진행했다. 패전 때까지 원폭 개발을 손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카와 박사는 일기에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의 심경도 간접적으로 밝혔다. 그는 피폭 이튿날 일기에 “신문 등으로부터 히로시마에 떨어진 신형 폭탄인 원자폭탄에 대한 해설을 부탁받았지만 거절했다”고 적었다. 그가 전후 반핵 평화주의 운동을 펼친 계기가 됐다고 아사히는 평가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