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선 장판각 내부는 7단 높이의 책장들이 가득했다. 책장엔 오랜 세월에 까맣게 때가 탄 목판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장판각은 목판의 훼손을 막기 위해 최첨단 시설을 갖췄다. 내부 벽면은 오동나무로 마무리됐고 자연바람이 통할 수 있는 장치와 함께 자동 항온·항습기와 화재 자동감지기, 무인경비 시스템 등이 갖춰져 있다.
안동 국학진흥원 수장고 가보니
국학자료 48만점 보유 … 국내 최다
목판·책 등 기록자료 국보·보물급
“완벽히 국역된 자료는 1%에 불과
깊이 있게 조사해 유산 발굴할 것”
이곳에서 만난 박순 국학진흥원 전임연구원은 장판각 2층 한쪽 구석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책장에는 ‘퇴계선생문집 경자본 709장’이란 글씨가 붙어 있었다. 보물 제1895호인 퇴계선생문집 경자본은 『퇴계선생문집』 경자년(1600년) 초간본을 인출한 목판이다. 장판각에 있는 목판 중 가장 귀한 목판 중 하나다.
그는 또 “조선시대 만들어진 목판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목판 수집 활동을 2002년부터 시작했는데 10년만 일찍 시작했더라면 하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다”고 덧붙였다.
장판각을 떠나 본관 건물 1층에 있는 현판 수장고로 향했다. 은행 금고처럼 육중한 철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는 편액(扁額·널빤지 등에 글씨나 그림을 새겨 문 위에 거는 액자)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에 등재된 편액 550점이다. 이곳엔 편액과 기문(記文·건물의 내력을 쓴 나무판), 주련(柱聯·건물의 기둥에 새긴 글) 등 현판류 1100여 점이 소장돼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나 석봉 한호(1543~1605), 번암 채제공(1720~1799) 등이 쓴 글씨로 만든 편액도 있다.
이처럼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기록유산들이 국학진흥원에 가득하다. 9월 말 기준으로 48만2475점이다. 국내 최다 기록유산 보유량이다. 매년 2만여 점이 늘어나는 추세로 미뤄 내년이면 50만 점을 넘어설 전망이다.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기록한 국보 제132호 징비록(懲毖錄), 지난 6월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 후보에 오른 만인소(萬人疏)도 국학진흥원 소장 자료다.
하지만 50만 점에 육박하는 국학자료 중 완벽히 국역된 자료는 1%에 불과하다는 것이 국학진흥원의 설명이다. 나머지 99% 자료가 제목만 정리된 채로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중에서 국보급 기록유산이 발견될 수도 있다.
오용원 한국국학진흥원 기획조정실장은 “선조들의 정신이 베어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각 자료를 소유하고 있는 개인과 문중의 도움 덕분”이라며 “국학자료들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은 물론 깊이 있는 조사를 통해 뛰어난 기록유산을 발굴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