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송호근 칼럼] 자사고 말려 죽이기

중앙일보

입력 2017.12.12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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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말도 많던 강남 8학군 문제를 해결한 것은 교육부·국토교통부·국세청이 아니었다. 바로 자사고였다. 우리의 불쌍한 기러기아빠! 월급을 몽땅 해외 송금하고 단칸방에 쭈그리고 생활하는 국가 백년대계의 전사, 기러기아빠를 면하게 해 준 건 바로 특목고와 자사고였다. 중학교 유학생이 2006년 9246명에서 2015년 3226명으로 감소했는데 특목고와 자사고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43개로 늘어난 자사고는 서울 강남 집값을 잡는 데 일조했다.
 
요게 꼭 조선시대 서원(書院)을 닮아가기에 일반 향교나 서당을 다니는 서민들의 빈축을 샀다. 공교육기관인 향교에 국가 지원이 줄자 교육이 부실해지고 훈장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향청에 둘러앉은 유지들이 궁리 끝에 계책을 냈다. 사학(私學)을 만드는 것, 서원이었다. 스타 훈장들이 모두 서원으로 몰렸다. 과거 합격자가 대거 서원에서 나왔다. 과시(科試) 출제자의 성향을 잘 아는 훈장이 많았다. 서원은 날로 융성해 조선 후기에는 권력 양성소가 됐다. 대원군이 철퇴를 내렸다. 재정을 갉아먹고도 대원군 집정에 반기를 들었던 까닭이다.

자사고 만드는 데 15년 걸렸다면
무너지는 데 5년이 안 걸릴 것
공교육 위해 자사고 붕괴시키나
이대로 가면 8학군 강남 쏠림과
조기 유학의 기러기아빠 양산돼

특목고·자사고는 자립형 사학이다. 권력의 눈 밖에 난 적은 없다. 오히려 예산 절감을 이유로 권력이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등주의에 반한다는 죄목으로 철퇴작업이 시작됐다. 조희연 교육감 초기부터 가동된 특목고·자사고 죽이기 프로젝트가 문재인 정부에서 새로운 동력을 얻었다. 학부모의 반발이 격해지자 꼼수를 냈다. 교육부와 교육청에 이런 꼼수의 대가들이 포진하고 있음은 진즉 알았지만 아무튼 ‘입법 예고’한 다음 자축포를 터뜨렸을 법하다. 특목고·자사고를 우선선발제에서 일반고와 동시에 하는 후기선발제로 바꿨다. 물론 리스크를 끼워 넣었다. 자사고에 지원해 탈락한 자는 미달된 일반고와 자사고에 강제 배정받는다. 모 아니면 도다. 올해 서울 지역 자사고 7개교가 정원 미달됐다. 학부모들이 리스크를 피해 갔다. 일반고 지원자는 선택권이 10개가 넘는다. 자사고 지원자는 단 1개, 떨어지면 강제 배정. 선택권을 제한했다. 공부 좀 해 보려고 마음을 다진 학생에게 부여한 문 정부의 심각한 처벌이다.
 
대체 뭐 이런 나라가 있나. 자사고가 도입된 것은 김대중(DJ) 정부 때다. 평준화만으로는 도저히 미래 대비를 할 수 없기에 수월성을 강조한 특목고와 자사고가 장려됐다. 평등주의 성향이 너무도 강한 한국 사회에서 수월성을 강조하려면 조건을 달아야 한다. 학비는 자율로 책정하되 학교재단이 예산의 3~20%를 자체 조달할 것, 정부 재정 지원은 일절 없음이 그것이다.
 

송호근칼럼

이명박(MB) 정부 당시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특목고와 자사고에 할당될 예산 2000억원을 아껴 일반고에 쏟아부었다. 광양제철고는 15년간 총 662억원을 포스코재단에서 받았고, 전주 상산고는 개인 출연이 439억원에 이른다. 왜 이들은 거금을 출연했을까? 인재를 양성한다는 백년지대계의 일념이었다. 맞춤형 수업, 교과교실제, 개인 연구, 무학년 무계열 통합수업, 교과 외 프로그램, 양서 읽기, 토론수업 등 일반고에선 상상할 수 없는 현장 개혁이 이뤄졌다. 수도권 집중을 막은 것도 이들이었다. 제주외국어학교에 육지민들이 몰린다. 국토 균형발전을 위한다면 지방 도시에 특목고와 자사고를 더 만들 필요가 있다. 단 자사고가 일반고 인재를 수시로 빼 가는 것을 금지하는 단호한 규정을 달고 말이다. 일반고의 원성이 높다.


자사고를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 데 15년이 걸렸다면 무너지는 데는 5년이 채 안 걸릴 것이다. 현 정부 임기 내에 충분하다. 열공하는 학생을 골고루 배치해 공교육 붕괴를 막는다는 것이 교육부·교육청의 발상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질문에 답해 보라. 특목고·자사고를 없애면 학력 수준이 올라갈까? 교육부가 발표했고 국제학업성취도 평가(PISA)도 입증한 바 한국의 수학능력미달자 비율이 중3은 6.9%, 고2는 9.2%로 더 치솟았다. 특목고와 자사고를 말려 죽이면 수포자는 줄어들까?
 
최근 개통된 SRT에는 아산병원·삼성병원 환자와 가족들, 대치동 학원가에서 족집게 강의를 받으려는 학생들로 붐빈다. 지방 거점 고등학교를 살리지 않으면 SRT는 지방 불균형을 촉진하는 특급 철도가 된다. 미국·영국의 엘리트 교육은 수백 년 전통을 자랑한다. 자사고와 특목고는 엘리트 교육도 아니다. 그저 학력 높이기 교육에 도달했을 뿐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내놓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야 진짜 엘리트 교육이다. 다 같이 놀자. 국무회의가 이런 계책에 도장을 꾹 누르는 순간, 강남 쏠림과 조기 유학 붐이 재점화될 것이다. 지난 정부는 ‘끼’를 살리라 했고, 지금은 ‘끼’를 죽이라 한다. 대체 우리의 ‘끼’는 뭘까?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