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항상 손발이 차고 그랬었는데, 화투패만 탁 잡으면 혈액순환이 촤악 되는게... 정말 내가 미쳤지 미쳤어."
2006년 영화 '타짜'에서 정마담은 표적인 '호구'를 꾀어내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화투패만 잡으면 온몸이 짜릿해진다고. 요즘은 나도 그렇다. 손발이 항상 차가웠는데, 혈액순환이 촤악 되는 것을 실감한다. 뭇 직장인들의 밤잠을 설치게 한다는 비트코인 투기판, 이른바 '코인판'에서 지난 보름을 견뎌낸 후일담을 풀어놓는다. 불법 도박판에는 전문 타짜라도 있지, 코인판엔 호구만 넘쳐난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하루에 '억억' 부자 되겠네
차트를 보며 인간은 수많은 상상력을 동원한다. "어제 사서 이때 팔았더라면"과 같은 몽상은 곧 "집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겠네"까지 발전한다. 주식 시장에서 대책 없이 당하는 전형적인 초보자의 한계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가상화폐 관련 온라인 게시판에는 비트코인의 무서운 상승세를 두고 각종 '인증'이 쏟아진다.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 단위까지 투자한 간 큰 이들의 간증이 이어지는 것이다. 초보자가 주식 시장에 이렇게 진입하게 되는 건가. 고민도 잠시. 어느새 푼돈이지만, 여윳돈을 쥐고 거래소로 달려가고 있다면 게임은 끝이다. 정마담은 '어떻게 호구를 판에 앉히느냐가 제일 어렵다'고 했는데, 비트코인 투기판에서 호구는 이렇게 판에 기웃거린다.
잠깐 '코인판' 용어
▶가즈아: '가자'를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 자신이 보유한 가상화폐의 가격이 오르기를 기원하는 일종의 주문. 효과는 전무하다. 가즈아아아~ Gazuaaa 등 다양한 형태로 쓰인다.
▶존버: 끝까지 버티다. 주로 높은 가격에 사서 가격이 내린 가상화폐를 손절하지 못한 이들이 쓰는 표현. 다시 오를 때를 기다리겠다는 의지.
▶약속의 X시: 다양한 시간 앞에 '약속의'라고 붙이는 표현. 이 시간부터 오르면 좋겠다는 희망. 역시 효과는 검증된 바 없음.
▶하드포크: 기존 가상화폐와 정책적으로, 혹은 기술적으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기 위해 다른 코인을 파생하는 기술개념. 일종의 새끼치기. 예를 들어 비트코인의 하드포크 가상화폐는 비트코인골드 등이 있다.
▶대장: 주식 은어 '대장주'와 비슷한 의미. 비트코인을 지칭한다. 가장 비싼 가상화폐의 대표자 격.
▶층: 자신이 매수한 가상화폐 가격을 부르는 말. 가상화폐를 사들일 당시 400원이었다면, '400층 공기 좋네요. 저보다 윗층 계신가요?' 라며 은근슬쩍 다른 사람들의 손실을 가늠한다.
▶기사: 세력이 가상화폐 가격을 들었나놨다 한다는 추측과 무언가 세력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혹은 단체. 버스기사가 버스를 운전하듯, 기사가 가상화폐 가격을 좌지우지 한다는 의미.
분석은 없다 '가즈아~' 믿고 나도 간다
지난 8일 가상화폐 게시판은 당시 199만원을 달리던 잡코인1 얘기로 가득했다. 시험 삼아 공부 좀 해볼까. 잡코인1에 주문을 넣고 매수가 체결됐다. 그런데 불과 10분 만에 240만원까지 올랐다. 꿈이냐 생시냐. 약 20% 정도의 수익이 발생한 셈이다.
몇 분이 더 흐르자 20%까지 올랐던 수익은 다시 마이너스대로 진입했다. 197~198만원 선에서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길 몇 시간. 결국 198만원에 전량을 매도했다. 손에는 땀이 나고, 일에는 집중할 수 없었다. 무섭게 변하는 수익률 숫자를 보느라 눈길을 차트에서 돌릴 수 없었다. '잡코인1 가즈아~' 믿고 나도 갔다가 작은 흥분만 경험한 채 소득 없이 빠져나와야 했다.
이 코인이 아닌가벼...저 코인으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새벽에 900까지 올랐다는 잡코인2를 800원에 사들였지만, 오전 내내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결국 768원에 매도. 가상화폐 투기의 무서운 점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매수할만한 다른 가상화폐가 없을까 잡코인3에 기웃거리게 된다는 점이다.
많은 투자자가 잡코인에 눈길을 주는 이유는 하나다. '초대박'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비트코인보다 크기 때문이다. 1비트코인의 가격은 현재 1500만원이 넘는다. 등락이 아무리 심해도 3000만원까지 오르지 않는 이상 200% 이익 실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20원짜리 코인이 하루아침에 1000원이 됐다고 상상해보라. 5000% 수익 실현도 꿈은 아니다. 잡코인으로 '가즈아'를 외치는 이들이 "내일 아침 벤츠 매장에서 만나자" "5000층에서 만나자"라며 서로를 다독이는 이유다.
주말은커녕 잠도 못 자요
새벽부터 미리 발을 뺀 이들도 있고, 고점(높은 가격)에서 물렸다(팔지 못했다)고 하소연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로 등장했다. 새벽부터 심야까지. 평일에서 주말까지 코인판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르는 것은 가상화폐 거래가 24시간 돌아가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산 가상화폐 가격이 급락하지는 않을까. 차트만 눈이 빠져라 쳐다보는 코인판 초보는 밤잠을 못 이루고, 주말에도 쉴 수 없다. 이들을 언론에서는 '코인판 좀비'로 부르기 시작했다. 진짜 가상화폐 투기판에선 아무도 이런 용어를 쓰지 않는다. 전형적인 언론이 가져다 붙인 용어다.
정부는 규제 한다는데...
정부의 규제 계획은 지난한 입법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는 점, 가상화폐 대부분이 중앙집중화폐와 달리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을 둔다는 점, 저항이 거셀 수 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최소한의 규제는 필요하다는 견해다. 가상화폐의 미래 가치가 아니라 단기 수익성 투기에만 매몰된 현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막대한 리스크를 기업이나 거래소가 아닌 개인 투자자만 떠안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원을 운영하는 차명훈 CEO는 "지금 코인 투기는 정말 큰 문제"라며 "가상화폐는 기술기반 투자 시장인 만큼 기술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전혀 이러한 움직임이 없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그는 "국내 많은 거래소가 오늘 가격 상승률 1위인 코인이 무엇인지 대놓고 보여주는 등 투기를 조장하는 느낌"이라며 "(투기를 위한) 단체카톡방도 많고, 텔레그램 등 메시지 서비스에서도 유료 정보 방이 운영될 정도"라고 진단했다.
정부의 규제와 관련해서도 차 CEO는 "당연히 규제가 필요하다고 본다"며 "투기성으로 몰아간다거나, 과대광고를 하는 것, 거래소의 예수금 관리에 대한 관리·감독 측면에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