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피아노를 항상 근엄하고 점잖게 연주했던 것은 아니다. 영화 ‘스팅’에서 봤던 것처럼 랙타임 같은 피아노 음악은 시끌벅적한 바에서 연주를 했다. 흑인 피아니스트들은 뿡짝뿡짝하는 왼손 반주 위에 엇박자의 싱커페이션 선율을 얹어서, 유럽의 고상한 피아노를 마치 아프리카의 타악기처럼 역동적이고 경쾌하게 변신시켰다. 초기 재즈 피아니스트들에게 배틀은 거의 일상이었다. 쾌활하면서도 에로틱한 부기우기로 청중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은 패츠 월러를, 건반 위의 괴물이라고 불리는 아트 테이텀이 나타나 불을 뿜어내는 듯이 강렬한 연주로 제압했을 때 청중은 광분했다.
우리의 인생도 무대 위에서 싸우는 배틀과 같아
싸워서 지더라도 승복할 수 있는 공정한 룰 필요
예나 지금이나 재미만큼은 싸움 구경이 으뜸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지금도 레슬링의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로 대변되는 그때 그 호쾌한 혈투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권투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싸움 스포츠다. 4전5기의 신화 홍수환이 카라스키야를 쓰러뜨리던 날,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들썩였다.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권투 대신 격투기가 인기다. 이종격투기, 종합격투기 등 종류도 다양하고 행사를 조직하는 기구도 여럿이다. 피가 튀는 싸움을 누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의외로 국내외에서 인기가 높단다.
꼭 주먹과 발로 다투어야만 싸움은 아니다. 승자와 패자를 정해야 하는 모든 것이 결국 싸움이 아닌가. TV의 가요 프로그램은 배틀로 개편된 지 이미 오래다. ‘나가수’로 시작해서 ‘복면가왕’ ‘히든싱어’ ‘팬덤싱어’로 대결의 방식도 쉬지 않고 진화하고 발전한다. 춤도 배틀이고, 요리도 대결이다. 그러나 어디 배틀이 예능에만 있을까. 대선의 후보자 토론도 가수나 셰프의 배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능보다 덜 재미있다는 것을 빼고는 말이다.
동네 편의점이나 빵집 주인, 택배 기사도 무대만 다를 뿐 배틀에 서는 건 마찬가지다. 고상해 보이는 학자들의 연구도 하나의 싸움이다. 누가 먼저 새로운 연구 사실을 발표할 것인가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기업의 경쟁 역시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인생 자체가 싸움터고 우리가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배틀인 셈이다. 그것도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훨씬 많은. 그래서 더욱 예능 배틀에 몰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곳은 실력이 승부를 가르는 세계이니까.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싸움의 룰이 조금만 더 공정할 수 있기를. 그러면 싸워서 지더라도 기꺼이 승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