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마라도 배우라는 친구 말에 충격 … 시력 잃었지만 커피 맛·향 얻었지요

중앙일보

입력 2017.12.0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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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이마트 커피 판매 1위 아로마빌 노환걸 대표
 

아로마빌 노환걸 대표가 일회용 드리퍼로 원두커피를 내리고 있다. 어느 컵에서나 손쉽게 원두커피를 내릴 수 있도록 노 대표가 5년에 걸쳐 개발한 제품이다. [김춘식 기자]

“안마라도 배워야 하는 거 아냐.”
 
친구가 무심히 던진 말이었지만 아로마빌 노환걸(54) 대표에겐 큰 상처였다. 2010년 노 대표는 망막색소변성증 판정을 받았다. 망막 색소가 변성돼 점차 시력을 잃는 병이다. 커피 전문 식품회사에서 마케팅팀장으로 일했지만 그만둬야만 했다. 시력을 잃는 건 일상을 하나둘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가족과 잦아진 갈등이 제일 힘겨웠다”고 그는 고백했다.

커피 회사 다니다 망막색소변성증
아내가 차린 로스팅 회사 제2인생

장애인도 쉽게 마시는 원두커피
맡고 또 맡아 특유의 풍미 끌어내

품질로 승부, 2위와 두 배 차 매출
이젠 동남아 등 해외 시장에 도전

“딸이 고3이었는데 버스정류장으로 데리러 나오라고 전화를 했는데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화가 나서 딸에게 쏘아붙였죠. 알고 보니 다른 일이 있어서 늦게 도착한 것이었는데 그때는 딸도 저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났어요. 지금이야 너무 고맙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먹는 일조차 힘들어지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막막했어요. 안마 배우려고 인천에 있는 안마사 교육소에 3개월 동안 다녔어요. 그러다 그만뒀어요. 정말 이것밖에 할 수 없을까. 그래도 20년 넘게 커피밥을 먹어 왔는데 커피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동종 업계에서 일하던 아내가 2002년 차린 커피 로스팅 회사 아로마빌에 처음 출근한 게 2010년 여름 무렵이다. 막상 출근은 했지만 생두를 볶는 로스팅 과정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커피는 입과 코로 즐기는 거니까. 커피 특유의 풍미를 내는 것에 집중했어요.” 시각을 잃어버리니 대신 후각이 더 또렷해졌다. 생두를 선택하는 것도, 로스팅을 하는 것도 한층 예민해진 후각만으로 더 잘 판단할 수 있었다. 문제는 커피를 내리는 과정이었다. 김 대표는 혼자서 원두로 커피를 내리다 뜨거운 물에 수없이 손을 데었다.
 
그렇게 인고(忍苦)의 정성을 들여 만든 작품이 2015년 내놓은 일회용 원두커피 ‘핸드립’이다. 일회용 커피 여과지와 컵·원두커피를 일체형으로 만든 제품이다. “나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도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원두커피를 만들어보자고 해서 시작했어요. 실패도 많았어요. 스틱형 원두커피 제품을 만든 건 국내에서 우리가 처음이었는데 원두에서 이산화탄소가 나오면서 스틱이 뻥뻥 터져나갔어요.” 핸드립은 출시와 함께 캠핑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핸드립’ 원두커피 3종과 Rainbow 모카골드 커피믹스. 아로마빌이 생산하고 있는 자체 브랜드 제품이다. [사진 아로마빌]

아로마빌은 이마트와 손잡고 지난해 8월 노브랜드 콜롬비아 에스프레소 블렌드 원두커피를 내놨다. 올해 10월 기준으로 아로마빌이 생산한 노브랜드 커피는 매출 9억3500만원을 올려 이마트에서 판매되는 원두커피 중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이마트에서 판매하고 있는 원두커피가 160여 종인데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아로마빌이 1년 만에 제쳤다”고 말했다. 매출 기준으로 2위 원두커피와는 두 배 차이다.
 
노브랜드 콜롬비아 에스프레소 블렌드 원두커피에는 베트남·콜롬비아·브라질 세 가지 원두를 섞는데 상품 개발에만 1년이 넘게 걸렸다. “커피 특유의 풍미를 끌어내는 데 집중했어요. 여러 가지 커피를 섞어 냄새가 안 맡아질 때까지 맡고 또 맡았어요.”
 
소규모 커피 가게를 타깃으로 1㎏ 대용량 제품을 내놨지만 가정용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노 대표는 풍미를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생두만을 볶는다. 하루 최대 1.2t의 생두를 볶을 수 있지만 500㎏에서 멈춘다. 이렇게 볶은 커피를 일주일에 한 번 이마트로 보낸다.
 
노 대표는 일주일에 2~3번 회사 근처 이마트 매장에 들러 소비자 반응을 살핀다. “매장 앞에서 기다리다가 노브랜드 커피를 사 오신 분들이 있으면 왜 사셨느냐고 물어봐요. 향이 좋다는 분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내 코에서 완성된 커피니까요.”
 
매장 앞에서 세 시간 넘게 기다리다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있지만 식품회사 마케팅팀장 출신의 노 대표를 회사 직원들도 말릴 수 없었다고 한다.
 
아로마빌과 이마트가 손을 잡은 건 2012년 자판기용 커피믹스가 처음이었다. 노 대표의 고집과 행운이 만나 이마트를 움직였다. 이마트 가공식품 담당 임원이 식당 자판기에서 커피를 마시다 우연히 아로마빌이란 회사를 알게 됐다고 한다. 커피믹스 맛을 알아본 당시 이마트 담당 임원이 바로 최성재 신세계푸드 대표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식당마다 일회용 자판기 커피를 들이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시장이 생긴 거죠. 초반에는 맛이 꽤 괜찮았어요. 원재료를 아끼지 않았으니까. 언제부턴가 심심하고 맛이 없어졌잖아요. 달기만 하고. 원가 절감한다고 싼 재료를 쓰니까 그렇게 변했어요. 자판기 커피믹스 만드는 회사가 국내에만 200개예요. 원가 줄이는 법을 저라고 모르겠어요. 그래도 처음에 썼던 원재료 그대로 씁니다. 맛이 변하면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들이 바로 고객이니까요.”
 
그가 원두커피 상품 개발에 목을 매는 이유가 궁금했다.
 
“커피 문화가 바뀐 게 IMF 외환위기 무렵이에요. 그 전엔 ‘미스김’ 커피였어요. 회사 부장들이 여직원들에게 커피 한잔 타오라고 목소리 높일 수 있는 시기였어요. 커피 둘, 설탕 둘, 크림 하나. 병에 든 커피가 잘 팔렸죠. 커피 심부름하는 여직원들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일회용 커피믹스가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이제는 소비자들의 입맛이 올라가면서 원두커피 시장으로 찾아오고 있는 것 같아요. 30년 전에 회사 선배가 곧 원두커피 세상이 올 거라고 했는데 조금 늦었죠.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원두 냄새 맡는 일이니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아로마빌은 2015년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됐다. 24명 직원 중 9명이 55세 이상이다. 올 연말에는 4년에 걸친 질소 커피 개발을 끝냈다. 플라스틱 용기에 질소와 커피 농축액을 담아 물만 있으면 질소 커피를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노 대표의 도전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직원들은 개발비 좀 그만 쓰라고 하는데 그럴 수야 있나.(웃음)”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