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가지 공통점은 3명 모두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정신문화의 꽃을 화려하게 피웠던 주인공들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게 매우 흥미로운 포인트입니다. 비록 사는 곳은 떨어져 있었지만 이들은 각기 자신이 속한 문명에서 정신문화의 원류가 됐습니다.
BC 5세기 동서양이 함께 피운 인문의 꽃
동서양은 어떻게 정신문화 전성기 맞았나
춘추전국시대 공자 등 '제자백가'의 요람
제나라 관중으로부터 학문·이론 퍼져나가
'철기 보급'과 '문자 확산'이 인문발달 촉진
AI 기술혁신 앞둔 지금, 인문정신 되살려야
관용과 개방, 다문화 정신이 미래문명 핵심
2500년 전의 그리스처럼 중국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인문과 정신문화가 부흥했습니다. ‘인간혁명’은 동서양에서 어떻게 그런 일들이 동시에 가능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 떠나보고자 합니다. 지난주엔 3000년간 신화와 허구 속의 이야기로 잠들어 있던 트로이를 역사적 실체로 끌어낸 슐리만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죠. 오늘은 수 천 년 전 이미 현대의 중국을 설계한 관중(管仲, BC 716년 ~ 645년)의 이야기로 여행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중국의 설계자 관중이 있었다.”
기원전 8세기 천하의 패권 국가였던 주(周)나라가 쇠퇴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열렸습니다. 황제의 식읍(食邑·봉건제에서 왕이 제후들에게 내려준 봉토)을 받아 각 지역을 다스렸던 영주들이 이제는 스스로 왕을 자처하기 시작한 것이죠. 지금의 산둥반도에 위치한 제(齊)나라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왕을 살해하려 했던 관중은 사형 위기에 처하죠. 그 때 소백의 한 참모가 말합니다. “전하께서 제나라에 만족한다면 신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고 싶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을 겁니다. 부디 관중을 등용하십시오.”
참모의 의견을 중시했던 소백은 관중을 거두어 자기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후 관중은 자신이 죽이고자 했던 사람의 휘하에서 재상이 됐고 제나라는 춘추전국시대의 첫 패권을 쥔 나라로 등극합니다. 당시 자신의 암살자를 오른팔로 만든 소백이 바로 그 유명한 제나라의 명군주 환공(桓公, BC 685년 ~ 643년)입니다.
“젊은 시절 함께 장사를 하면서 나는 내 몫을 더 많이 챙겼지만 포숙아는 날 욕심쟁이라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세 번이나 패하고 도망쳤지만 그는 나를 겁쟁이라 하지 않았다. 내게 노모가 계신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叔兒也).”
오늘날 흔히 쓰이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표현도 그가 처음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다만 관중은 계급을 나누고 차별을 하기 위해 이렇게 구분한 것이 아니라 직업을 세분화 해 효율성을 높이려 했던 의도였습니다. 즉,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키워 본인의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농공상을 나눠 놓은 것이었죠.
관중은 재상이 되어 조세개혁을 단행하고 정전(井田·토지를 9등분으로 나눠 8가구가 한 등분씩 소유하고, 가운데 필지는 공동 경작해 수확물을 국가에 바치는 방식)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주고 토지 이용률을 높이는 한편 세금을 줄였습니다. 또 상인 출신이었던 관중은 바다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상주의 정책을 폈습니다. 상업이 발달하면서 화폐가 널리 유통됐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상업이 발달하니 국가의 경제력이 강해지고 나라의 재정 또한 튼튼해졌습니다. 제나라에서 시작된 기술혁신은 곧 이웃나라로 퍼졌습니다. 관중이 설계한 국가의 체제, 사회 구조 등은 곧 춘추전국시대의 ‘글로벌 스탠다드’가 됐죠. 당시 국가들의 대부분이 철기구와 우경 등 기술혁신을 통해 높은 생산성을 갖게 됐고, 상업의 발달로 다양한 문물이 교류되면서 춘추전국시대는 문화적 융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관중이 ‘사농공상’이라는 직업 구분을 했던 것처럼 평민 중에서 ‘사(士)’라는 계층이 처음 생겨납니다. 제후와 대부처럼 토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귀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 조세를 바치는 일반 서인도 아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력이 급증하면서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죠.
바로 ‘제자백가’의 출현입니다.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대부분의 사상들이 이 때 나왔습니다. 인과 의, 예 등 사람의 본성과 도덕을 강조한 공자와 맹자의 유가 사상, 엄격한 법과 제도를 중시한 한비자의 법가, 자연과 무위를 강조하는 노자와 장자의 도가, 평화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 묵자의 묵가 등이 꽃을 피웠습니다.
특히 공자는 제자백가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유럽에 소크라테스가 있다면 아시아엔 공자가 있죠. '군자'를 강조하는 그의 정치사상은 훗날 맹자로 이어지며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체계의 원류가 됩니다. 특히 조선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을 받아들인 신진사대부가 주축이 돼 세운 나라로 500년간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릅니다.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의 체제를 만든 것이 관중이라면, 그 안에 혼을 불어 넣은 건 공자입니다.
당시 그리스와 중국은 서로 교류를 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농사에서 철기를 도입하고 문자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똑같은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지식인 집단이 전문적으로 세상의 근원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 거죠. 그렇다 보니 비슷한 생각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탈레스와 관중은 세상의 근원을 모두 ‘물’이라고 했죠. 정치지도자의 이상으로 현명한 철인을 제시한 플라톤이나 인과 예를 갖춘 군자를 말하는 공자는 일맥상통합니다.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역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술의 발달은 혁명적인 문명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새로운 문명은 인간의 삶과 사회 제도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하게 만들고요. 개방과 관용의 정신을 토대로 다양한 생각이 오가며 성숙한 담론이 모아지면 그 시대의 문명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물질적 성장에 걸맞은 정신적 성숙을 이루지 못했을 때, 다양성이 억압되고 획일성이 강조될 때 그 사회는 곧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죠.
4차 혁명으로 불리는 우리의 미래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변했던 2500년 전 동서양보다 훨씬 큰 기술혁신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문자’에 한정됐던 지식과 문화의 소통 수단은 동영상과 홀로그램, 가상현실 등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있고요. 국가 간 장벽은 낮아지고 교류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제자백가와 소피스트가 그랬듯 한 단계 더 높은 정신문화와 인문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갖춰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선 기대보다 걱정이 앞섭니다. 과거 지혜로운 선조들이 그랬듯 우리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민 개개인의 의식은 눈부신 문명의 발전을 정신문화와 조화시킬 수 있을 만큼 성숙한지, 우리의 제도는 차별과 격차를 줄이고 공정한 기회를 통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을 만큼 숙의성을 갖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비록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살았던 이들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총량은 훨씬 많을지 몰라도, 정작 우리가 그들보다 더욱 지혜로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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