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사태 제작·감독·주역인 빈살만 왕세자의 위험한 도박
2015년 1월 왕위에 오른 살만 국왕은 치매를 앓는다는 시선을 받아왔는데, 지난 6월 왕세자이던 조카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전격 폐위했다. 그 자리에 아들 빈 살만을 지명한 지 5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양위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그는 국방장관을 맡은 2015년 예멘에서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반군의 세력을 줄이지 못한 채 민간인 희생자만 양산했다는 인도주의적 논란에 휩싸였다. 수니파 아랍 국가들과 손잡고 카타르 봉쇄 작전도 이끌었다. 지난 4일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왕족과 주요 기업인, 고위 관료 등 수백명을 체포했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서 전격 사퇴를 선언한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의 행보에도 빈 살만이 배후로 꼽혔다. 18일(현지시간) 하리리 총리가 프랑스로 이동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만난 뒤 레바논 귀국 의사를 거듭 밝혔지만 중동의 긴장은 풀리지 않고 있다.
살만 국왕 부자가 사우디 지배구조의 근간인 형제간 왕위 승계를 중단한 뒤 부자간 왕위 계승을 원활하게 하고 향후 통치 기반을 마련하려는 과정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파생됐다는 분석이다.
'석유의 저주' 시달리는 사우디, 경제개혁 성과내야 정통성 확보
사우디는 ‘석유 자원의 저주'를 겪고 있다. 풍부한 화석연료가 역설적으로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석유 부문은 사우디 예산 수입의 약 87%, 수출의 90%, 국내총생산(GDP)의 42%를 차지한다.
하지만 1950년부터 2006년 사이 사우디의 1인당 GDP 증가 폭은 자연자원이 없는 이스라엘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1932년 건국 이후 풍부한 원유를 수출해 부를 누리다보니 인적 자원 개발도 더뎠다. 경제의 대부분을 외국인 노동에 의존해온 탓에 사우디의 청년 실업률은 지난해 30%에 육박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몇년간 유가가 하락하면서 지난해 사우디 정부의 재정 적자는 3000억 리얄(약 92조원)에 달할 것으로 집계됐다.
빈 살만은 이를 노리고 '비전2030'을 선보였다. 석유에 의존하던 경제 구조를 다변화하고, 현재 40%인 민간기업의 기여도를 65%로 늘리는 내용이다. 서북부 홍해 인근 사막과 산악지대에 서울의 44배 넓이에 해당하는 미래형 신도시 ‘네옴’(NEOM)을 건설하겠다는 프로젝트도 발표했다. 투입되는 돈만 약 5000억 달러(약 550조 원)다. 이 도시에는 석유 대신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가 공급된다.
하지만 사우디 정부는 투자 재원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재정 적자가 GDP의 17%에 달하는 실정이다. 국민에게 제공해온 보조금을 줄이기도 여의치 않다.
"이번 주 왕위 이양" 英 매체 보도
'왕자의 난' 정통성 얻으려면
인구 절반 젊은층 지지 확보가 필수
'석유의 저주' 벗어날 실행자금 마련이 목적
체포한 왕족 자산 빼앗아 재원 활용 추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내년 상장해 자금 조달 예정
중동 불안으로 고유가 상황, 상장에 유리
NYT "이집트 인권탄압 전 장관이 조언자"
"미 국무부 등 비극만 초래할까 우려"
구금한 왕족들에게 '자산 내놔라' 협상…"최대 3000억 달러"
중동 질서의 한 축인 사우디의 정정 불안은 국제 유가 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빈 살만의 노림수와 무관치 않다.
빈 살만은 비전2030 실행을 위해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를 내년에 사우디와 해외증시에 동반 상장하고, 지분의 최대 5%를 매각할 계획이다. 빈 살만으로선 아람코를 최대한 비싸게 매각하려면 유가 상승이 필수적이다.
빈 살만은 여성 운전을 허용하는 등 온건 이슬람 노선으로의 탈바꿈도 선언했다. 사우디의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이 20.1%로, 188개 국가 중 174위에 그치는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이집트 인권탄압 전 장관이 조언자"…과격 행보에 서방 우려
뉴욕타임즈(NYT)는 빈 살만이 왕족 등을 체포해 구금하는 과정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 재임 중 내무부 장관을 지낸 하비브 알 아들리의 조언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아들리는 재임 중 고문과 납치 등 인권 탄압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 사우디 왕족의 체포 과정에서도 폭력이 자행돼 일부가 치료를 받았다고 NYT는 전했다. 블룸버그는 “부패가 줄면 외국인 투자가 늘어나는 건 맞지만, 합법 절차를 따르지 않고 왕족들을 체포하는 빈 살만의 모습에 ‘다음은 내가 될 수 있다'고 느끼는 외국계 투자자도 많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NYT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빈 살만에 우호적인 것과 달리 미 국무부나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관계자들은 빈 살만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 결국 미국에 손해를 끼치게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소개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