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연기를 좋아했다. 화면을 장악하는 연기만이 ‘좋은 연기’로 주목 받기 쉽지만 유연하고 진솔하게 연기하는 그의 캐릭터들엔 늘 배려가 묻어있었다.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 연출자에 대한 배려, 관객에 대한 배려까지.
한준희의 잡동사니 상영관 '광식이 동생 광태'
정말 깊이 사모했던 대학시절의 짝사랑 윤경(이요원)과도 그런 식이었다. 광식은 한심했고, 윤경은 눈치 채지 못했다. 비운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비운. 그렇게 세월이 갔다. 그리고 둘은 7년이 지나고서야 지인의 결혼식에서 마주한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광식의 일상을 뒤집어 놓는다. 정말로 윤경이 올까? 아냐, 누가 봐도 그냥 한 말이잖아? 근데 그러다 진짜로 오면? 이 소심한 청년의 가슴이 다시금 뛰기 시작한다.
윤경은 맘에 없는 말을 쉽게 뱉는 사람이 아니었다. 혹은 광식의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윤경이 ‘정말로’ 사진관에 찾아온다. 하지만 웬걸. 광식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훨씬 더 적극적인 그의 조수(정경호)가 먼저 윤경에게 들이대기 시작한다. 아, 또 꼬이고 말았다. 역시 난 안 되는 것인가 싶은 광식의 처연한 표정….
광식의 얼굴은, 광식의 표정은 당최 관객들에게 어떤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답답하다’는 기분보다 ‘그래, 저럴 수 있지. 나도 그랬는데 뭐’ 같은 감정이 먼저 선행한다. 왜? 광식이란 캐릭터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결코 불평하거나 남 탓하지 않는 인물이니까.
누굴 탓할 것도 없다. 본질은 아무 말 못한 나고, 그런 내가 바보인 거야라고 읊조리며 말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그 유명한 장면이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이 순간, 이 영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정서가 실제 김주혁이란 연기자의 얼굴에 묘하게 겹치기 시작한다. 동시에 우리가 광식이란 인물의 등 뒤에 붙어 바싹 쫓아갈 수 있었던 연유도 알게 된다. 관객들을 ‘편하게’ 태우고 두 시간짜리 영화를 달려가게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얼굴. 그게 배우 김주혁의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글=한준희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