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선에 담긴 '역사코드'
베트남 방문 일정을 짜는 과정에서 청와대에서는 문 대통령의 동선을 놓고 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중부 꽝남성 출라이 경제구역에 있는 병원을 방문할지 여부였다.
“‘꽝남종합병원’에 가봅시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본지에 “노무현 정부 때 베트남 중부에 무상원조로 병원을 지어준 게 있는데, 문 대통령은 그곳을 방문하고 싶어했다”며 “하지만 APEC 일정 등을 감안해 병원 방문 계획은 무산됐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이 APEC이 열리는 다낭에서 남쪽 100㎞ 정도 떨어져 있어 가는데만 1시간 이상이 걸려서 도저히 동선을 짤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가 언급한 병원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꽝남중앙종합병원’이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베트남을 국빈 방문했을 때 지원을 약속해 세워졌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무상원조 최대 규모인 3500만 달러가 투입됐다.
베트남 중부 오지에 세워진 병원
당시 노무현 정부가 외딴 베트남 중부에 7층 규모의 최첨단 병원을 짓기로 한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베트남 중부 지역은 1964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당시의 상륙지이자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APEC 정상회담 열리는 다낭, 과거 미군 고엽제 저장소
문 대통령, 베트남 방문 전 '꽝남종합병원' 방문 검토
김정숙 여사, 사실상 문 대통령 대신 파병지 꽝남 방문
문 대통령, 베트남 파병 과거사 관련 메시지 여부 주목
노무현 정부는 한국군 참전지에 병원 설립을 약속하면서 “한국군 참전지역인 중부지역에 대한 지원을 통해 베트남의 새로운 세대들이 한ㆍ베트남 양국관계에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시각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진주’로 불리는 다낭과 전쟁의 상처
이번 APEC 정상회담이 열리는 베트남 다낭은 ‘베트남의 진주’로 불리는 국제적 관광지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이곳에는 고엽제인 ‘오렌지 에이전트’를 보관하던 미군기지가 있었다.
미군은 베트남전 당시 밀림에서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고엽제를 대량 살포했다. 1962년부터 1971년 사이 과거 월남 땅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에 7500만 리터의 에이전트 오렌지와 제초제가 사용됐다. 베트남에서만 최대 500만명 이상의 고엽제 피해자가 발생했다. 국내에도 고엽제로 인한 피해자가 최대 16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고엽제 보관소가 있던 베트남 중부에는 지금도 수만명의 고엽제 피해자가 있다.
첫 일정으로 ‘꽝남’을 방문한 김정숙 여사
김정숙 여사는 10일 오후 3시40분(현지시간) 베트남의 첫 일정으로 꽝남성 땀끼시 땀타잉면에 있는 벽화마을을 방문했다. 꽝남성은 한국이 지어준 꽝남병원이 있는 곳이자, 응웬 쑤언 푹 현 베트남 총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승전국 베트남과 파병국 대한민국
청와대는 이번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과거 베트남 파병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메시지를 낼지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베트남은 최강국 미국과 전쟁을 치러 이겼다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나라”라며 “베트남 당국의 의사를 파악해 본 결과 베트남전에서 발생했던 과거사에 대한 한국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더라”고 말했다. 그는 “베트남에서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파병을 통해 사실상 ‘패전국’이 됐던 한국 정상의 사과를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도 존재한다”고도 설명했다.
역대 대통령과 베트남 전쟁
역대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시 베트남 파병 문제는 늘 민감한 이슈였다.
베트남과의 수교는 노태우 정부때이던 1992년 재개됐다. 1996년 베트남을 방문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에 침묵했다. 베트남 공산당을 창건한 ‘국부’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도 참배 대상이 아니었다.
베트남전에 대한 첫 사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했다. 그는 1998년 베트남을 방문해 호찌민 묘소를 참배했다. 2001년 방한한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는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개인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이 월남전에 참전해서 월남인들에게 고통을 줬다는 대통령의 역사 인식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비난했다. 이틀 뒤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김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6ㆍ25전쟁 때 우리를 도운 16개국도 북한에 사과해야 하느냐”고도 말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우리 국민이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란다”며 과거사에 대해 우회적으로 사과했다. 그는 호찌민 묘소 참배는 물론, 한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호찌민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앞에서 묵념했다.
2009년 베트남을 방문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호찌민 묘소를 참배했지만, 사과는 없었다. 그는 라디오 연설에서는 “베트남 주석과는 형ㆍ동생하는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3년 베트남을 방문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호찌민 묘소에 참배했다. 묘소 참배 외의 별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에 월남파병이 이뤄지는 등 양국 간에 아픈 과거가 있었는데 그 딸이 대통령이 돼 적군의 수장이었던 호찌민 주석의 묘소에 참배했으니 베트남 국민들로서도 각별한 심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평가했다.
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지난 6월6일. 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전을 언급했다. 그는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다”며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고, 그것이 애국”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국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생긴 병과 후유장애는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라며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로,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다”고 강조했다.
과거 목숨과 바꾼 대가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점을 평가하고, 그들의 희생에 대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6일 뒤인 6월12일, 베트남 외교부는 홈페이지에 “한국 정부가 베트남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양국 우호와 협력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는 대변인 명의의 입장문을 실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외교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라며 "문 대통령이 외교 관계에서 역사를 중시하는 배경도 바로 이 때문인데, 현충일 추념사는 문 대통령의 '외교 원칙'을 재차 곱씹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신(新)남방정책’과 베트남
문 대통령은 이번 동남아 방문의 목적을 ‘신남방정책’에 따른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두고 있다. 인도네시아와는 정상회담을 통해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양국의 관계를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신남방정책과 관련해 “지금까지 한국은 동남아를 생산기지로만 여겨왔지만, 동남아는 이제 협력의 대상이자 향후 소비지로서의 위치가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동남아 10개국으로 구성된 ASEAN 국가들이 모두 남ㆍ북한과 동시에 외교관계를 열어두고 있다는 점은 한반도 안보 상황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번 베트남 방문은 APEC 정상회담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며 “문 대통령은 아세안의 핵심 파트너가 될 베트남에 별도 방문 일정을 구상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미 4번째 수출시장인 베트남
베트남은 2015년 기준 우리나라의 4번째 수출시장이다. 여기에도 역사가 있다.
1996년 ‘세계경영’을 내걸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20년 가까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랜드마크였던 ‘대우호텔’을 지었다. 당시 대한민국 대사관이 이곳에 입주해 있었고, 한국의 귀빈이 오면 당연히 이곳에 묵었다.
현재 하노이의 랜드마크는 ‘랜드마크72’다. 서울 여의도 63빌딩보다 100m가 높고, 연면적인 3.5배에 달한다.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동남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한복을 입고 패션쇼 무대 위를 걸으며 화제가 됐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베트남 다낭=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