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통령은 매년 초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두교서(State of Union)’를 발표한다. 한 해의 시정 방침을 밝히고, 의회에 협조를 요청하는 연례행사다. 백악관 수뇌부는 물론이고, 행정부 장관들과 상·하원 의원, 대법관 전원이 참석한다. 만에 하나, 그 자리에서 불의의 사고가 발생해 참석자 전원이 유고가 되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백악관은 장관 중 한 명을 행사에서 열외시킨다. 지정생존자다. 지정생존자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워싱턴 밖의 은밀한 장소에서 대통령이 맡긴 ‘핵 코드 가방’을 갖고 대기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첫 번째 연두교서 발표 때 보훈장관인 데이비드 슐킨을 지정생존자로 지명했다.
미 정치 현실 거꾸로 빗댄
화제의 미드 ‘지정생존자’
‘러시아 스캔들’ 부담 속에
오늘 한국에 오는 트럼프
드라마 봤다면 소감이 궁금
트럼프는 이 드라마를 봤을까. ‘지정생존자’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다. 백악관 오벌 오피스의 TV채널은 폭스뉴스에 ‘고정(?)’돼 있기 때문에 못 봤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지상파인 ABC에서 방영되는 화제의 드라마 아닌가. 트럼프가 보여 주고 있는 리더십은 ‘지정생존자’에서 커크먼이 보여 주고 있는 리더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모든 걸 다 떠나 커크먼은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지정생존자’는 미국의 정치 현실을 거꾸로 빗댄 우화적 드라마일 수도 있고, 미 정치인들을 위해 만든 교육용 드라마일 수도 있다. 트럼프를 위한 드라마란 생각도 든다.
지금 트럼프는 ‘러시아 스캔들’에 발목이 잡혀 있다. 트럼프 대선 캠프와 러시아의 유착 의혹을 수사 중인 로버트 뮬러 특검은 이미 폴 매너포트 전 선대본부장 등 3명의 캠프 핵심 관계자를 기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련성을 부인하며 불끄기에 급급하고 있지만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탄핵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한국에 이어 방문할 중국에선 ‘황제’로 등극한 시진핑(習近平)이 기다리고 있다. ‘국빈+α’의 예우로 트럼프를 극진히 모시겠다지만 시진핑인들 트럼프의 국내정치적 약점을 모를 리 없다. 결코 호락호락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웃으면서도 따질 건 확실하게 따질 공산이 크다.
드라마에서 커크먼의 첫 번째 해외순방은 성과 없이 끝난다. 핵무기 감축을 위한 러시아와의 협상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들에게 제안하지만 미 국내 문제를 이유로 동맹국 정상들은 지지를 유보한다. 의사당 테러의 배후를 이슬람 테러세력으로 보고, 주모자를 검거했지만 사실은 미국 내 반역 세력이 사주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커크먼은 동맹국 정상들로부터 외면당한다. 내정(內政)이 외치(外治)의 발목을 잡은 꼴이다. 드라마는 현실을 초월하지만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지정생존자’ 보셨습니까. 혹시 보셨다면 그에 대해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서울에 오는 트럼프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