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2가지뿐…오전 11시~오후 2시 영업
소 꼬리찜(1만7000원)과 곰탕(1만원) 두 가지만 파는 음식점이 있다. 찜이든 탕이든 이 집 음식을 받고 보면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다들 놀란다.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스타일에 양념 방식도 희한하다. 흔히 ‘파 범벅 꼬리찜’이라고 부른다. 사람마다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갈린다. 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좋아할 수 없는 음식이다.
평일 닷새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하루 3시간만 영업을 한다. 매주 토·일요일과 달력에 빨갛게 표시한 날은 모두 쉰다. 계산해보면 1년 중 문 여는 날이 250일에 못 미친다. 영업시간이라도 준비한 음식이 다 팔리면 문을 닫는다. 좌석은 1층 36석, 단체 예약을 주로 받는 2층 방에 좌식 20석 정도가 있다. 낮 12시 이전이나 오후 1시 이후에 가면 자리가 비교적 넉넉하다. 을지로4가역 6번 출구로 나가 방산시장 가는 길 뒷골목에 있는 ‘순흥옥(서울 중구 을지로33길 9/전화 02-2265-0953)’이다. 간판이 어지럽게 걸린 상가 골목에 음식점 표시라고는 옥호 세 글자만 보일락말락 붙어있고, 입구는 좁아 처음 가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복도 같은 좁은 통로를 몇 걸음 들어가면 작은 마당과 주방이 나온다.
소 꼬리, 잔손 많이 가 다루는 음식점 적어
소 꼬리 음식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식료품이 아니다. 소 한 마리에서 한 개밖에 나오지 않으므로 귀하다. 귀하다 보니 전설 같은 얘기도 있다. 소 꼬리와 족이 사람에게 왜 좋은지 뭔가 근거가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꼬리는 여름 내내 등에 붙은 파리를 쫓느라 휘둘러대고, 발은 겨우내 언 길을 갈 때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기운을 집중하기 때문에 사람이 그걸 먹으면 모자라는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근래엔 대개가 수입품이니 예전처럼 귀할 이유는 없지만, 음식으로 만드는 과정에 잔손질이 많이 가서 음식점에서 다루기를 꺼린다. 반(半)조리 상태로 포장해서 나오는 제품도 있지만, 기계적으로 한꺼번에 많이 끓이면 특유의 졸깃한 맛을 살리지 못해 소비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뿌리의 살’은 반골(엉덩뼈)에 붙은 살을 말한다. 소 꼬리는 꼬리뼈와 반골로 구성된다. 여러 마디로 이루어진 꼬리뼈는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고, 반골에는 살코기와 기름기가 붙어 있다. 요즘 음식점에 들어오는 소 꼬리는 대부분이 수입품이라 반골까지 있는 물건을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쇠약가리’는 아마 갈비의 어떤 상태를 이르는 듯하다. ‘약’은 옛말로 양념이다. 이렇게 보면 양념갈비다. 그런데 바로 뒤에 기름장·후추·깨소금에 주물러 양념을 한다는 말이 나와 자연스럽지 않다. 접두사로 ‘약’을 쓰면 ‘약한’의 뜻이 더해진다. ‘약한 갈비’라면 무슨 말일까. 갈비 자투리나 마구리를 말할까. ‘부아’는 허파를 말한다. 예전에도 소 꼬리가 귀하니까 다른 고기를 섞어서 탕을 끓인 모양이다. 맛을 개국에 비교한 걸 보면 개국이 더 일반적인 음식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순흥옥’의 꼬리찜과 곰탕은 독특하다. 인터넷 세대 단골들은 ‘지구 최강 파 범벅 꼬리찜’이라고 말한다. ‘파 범벅 꼬리찜’은 한국에서 이 집이 유일한데 소 꼬리를 한국처럼 해 먹는 나라가 없을 터이니 지구에서 최강이라는 것이다. 큰 대접에 삶은 꼬리 세 토막과 감자 한 덩이 담고 데쳐 둔 대파를 수북하게 얹은 다음 끓는 꼬리 국물로 7~8차례 토렴해서 낸다. 상에 올리기 직전 반 토막으로 잘라서 데친 파를 먹기 좋게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준다. 『규합총서』 설명 중 “삶은 파를 많이 넣어”라는 대목이 생각나는 조합이다.
꼬리 살은 적당히 익어 쫄깃하고 꼬들꼬들하다. 뜯어 먹는 재미가 있다. 꼬리 끝부분을 먹을 때는 토종닭 정강이 살을 뜯는 듯하다. 젤라틴 성분이 많은 꼬리 근육의 특성을 살리면서 질기지 않고 너무 무르지도 않게 잘 삶았다. 적당하게 삶은 덕에 고기의 향미도 풍부하다. 김 여사는 “2~3시간 삶으면서 고기를 손으로 만져보면 느낌이 온다. 너무 삶으면 뼈가 쏙 빠져 버려서 모양도 안 나고 살이 너무 퍼져서 맛이 없다. 손으로 만져 적당하다 싶을 때 건져서 식혀 뒀다 토렴한다”고 설명했다. 토렴하는 국물은 꼬리곰탕과는 약간 다르다. 꼬리를 삶아낸 뒤 소금·고춧가루·생강·마늘 양념을 해 끓인 것이다. 김 여사는 “미O(MSG 계열 조미료)도 조금 넣는다. 조금은 꼭 넣어야 한다. 마늘은 넣고 싶으면 넣고 안 넣어도 된다”고 했다. 국물을 끓을 때 찜에 얹는 대파를 데치기도 한다. 이 국물이 꼬리찜에 따라 나간다.
국물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 넣어 양념
꼬리곰탕은 창업주인 시어머니로부터 김 여사가 물려받은 것이다. 삶은 꼬리를 건져낸 국물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타고 계속 끓인다. 대접에 꼬리 한 토막과 데친 대파 한 줌 띄우고 끓는 국물을 덜어 담으면 꼬리곰탕 한 그릇이 만들어진다. 주문할 때 ‘뺀 거’라고 하면 대파를 넣지 않은 곰탕을 준비해준다. 곰탕에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를 풀고 소면을 말아 먹는 건 꼬리찜 먹을 때와 같다. 손님들이 찜과 탕을 주문하는 비율은 80~90% 대 10~20%. 탕이 값은 싸지만, 마진율은 높은데 손님은 찜에 몰린다.
이종화씨가 일곱 살(한국식 나이) 때 주방을 책임지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물려받았다. 그 전에도 두어 해 동안은 할머니가 가끔 편찮을 때마다 주방 일을 대신 하면서 일을 배웠지만, 본격적으로 맡은 것은 1976년이다. 그때부터 다른 메뉴는 점차 정리하고 꼬리에 집중했다. 꼬리만 다룬 지 40년쯤 된다.
파래김 무침과 갓김치로 국물에 간을 하는 방식은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시작했으니까 내력이 35년 안팎 됐다. 처음엔 국물이 맛있으니까 손님이 국수를 찾아서 삶아줬더니 너도나도 달라고 해 국물에 소면 사리는 고정으로 주게 됐다. 소면 말아 먹을 때 잔치국수처럼 김을 올리면 맛이 더 좋을 것 같아 파래김 무침을 상에 놨다. 그걸 본 손님이 갓김치 얘기를 하기에 해봤더니 반응이 좋아 그대로 정착됐다. 갓김치를 한동안 묵은지로 내다가 요즘은 오래 묵히지 않은 거로 낸다. 일손이 없어서 많이 담그지 못해 묵히지 못한다. 조금씩 담가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 묵은지와 덜 익은 것, 두 갓김치에 대한 손님들 반응은 반반이다.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충무로는 영화인들이 많이 떠났고, 예전 단골이나 큰 손님들은 현업에서 은퇴하고 집에 들어앉거나 돌아가시면서 다 빠져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손님들뿐이었는데 최근에는 오랜 단골들이 와서 보고는 젊은 손님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래도 50대 이상 손님이 70% 넘는다. 3대 사장이 태어나기 전부터 다니는 단골도 꽤 있다.
예전만 못한 방산시장…밤엔 인적 드물어
그렇지만 상황은 좋지 않다. 방산시장 주변인 이 동네엔 저녁이면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상권이 활기를 잃어 장사가 잘 안되니까 직원 없이 혼자 점포를 지키는 사업자들이 많아졌다.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점심은 배달시켜 먹고 돈이 잘 안 벌리니 저녁은 집에 가서 먹는 사람들이 늘어 손님이 없다. 모자(母子)는 “요새 젊은이들은 안 온다. 아버지 따라 와봤던 사람들이나 간간 올까. 먹어본 사람들만 어쩌다가 와서 먹는다. 예전에 많이 오던 시장 사람들, 인쇄 골목 사람들도 별로 안 온다. 오히려 먼 데서 손님들이 찾아온다”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옥호도 교통정리를 했다. 예전 간판에는 ‘순흥집’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이름이 지명 ‘순흥’을 더 연상하게 했다. 초창기부터 간판하고 상관없이 사람들은 순흥집·순흥옥을 섞어 불렀다. 이 주변에 우래옥(1946년 개업)·문화옥(1952년)·강산옥(1958년)·보건옥(1980년 전후) 등 ‘옥’으로 끝나는 노포 음식점들이 골목을 돌아서면 하나씩 나온다. ‘옥’을 오래된 집의 돌림자쯤으로 여기는지 간판이 ‘순흥집’이든 뭐든 ‘순흥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집을 고치면서 옥호도 ‘순흥옥’으로 정리했다. 주변의 ‘옥’ 네 곳은 창업한 곳에서 자리를 옮겼지만 ‘순흥옥’은 처음 시작한 곳에서 옮기지 않고 외아들 대물림으로 72년을 이어왔다.
좌식이던 실내 지난해 입식으로 전면 수리
음식점을 오후 2시에 문 닫는다고 하면 그때부터 쉬는 줄 알지만 그건 아니다. 영업 마치면 주방 일 도와주는 아주머니는 퇴근하고, 이씨 혼자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다 보면 오후 8~9시는 돼야 집에 간다. 매일 커피머신 청소에만 꼬박 20분이 걸린다고 한다. 아침엔 7시 30분쯤 나와 소 꼬리 핏물 빼서 삶고, 파 다듬고 하면 11시에 손님 받기 빠듯하다. 온종일 매달려 있다고 봐야 한다. 핏물 뺀 꼬리는 초벌 삶아서 가위로 일일이 기름기를 제거해야 한다. 예전에는 동대문시장 정육점에서 대놓고 썼는데 지금은 마장동에서 꼬리를 보내준다. 기름기를 1차 제거한 걸 받지만 삶으면 기름 덩이가 다시 드러나 식혀서 다듬어야 한다. 하루 10단 쓰는 대파도 다듬고 씻어서 손으로 뚝뚝 잘라 놓는다.
식당은 행정구역상 을지로4가이지만 앞길 건너는 주교동과 방산동이다. 주교동은 이 마을 126번지 북쪽 배오개다리쯤에 나무로 놓은 배다리[舟橋]가 있었기 때문에 배다릿골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청계천에 물이 많을 때는 쪽배를 연결해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닌 모양이다.
배오개는 원래 배고개[梨峴]인데, 애고개[阿峴]가 애오개가 되듯 ‘고’에서 ㄱ이 탈락하면서 음이 변한 것이다. 고개는 종로4가 사거리~원남동 사거리 도로 위에 있었는데 길을 내면서 깎아 없어졌다. 종묘에서 벋어 나온 구릉의 한 줄기였다. 이 일대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이현궁(梨峴宮)이 있었다. 지금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 자리에 조선 시대에는 배오개시장이 있었다. 채소와 해산물을 많이 거래했다. 종루(현 종각) 앞 시전상가,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조선 후기 서울 3대 시장의 하나였다.
청계천 준설토 쌓았던 '꽃다운 산(芳山)'
방산동은 향기로운 산[芳山]이 있는 동네라는 이름이다. 조선 영조 때는 청계천을 준설하며 퍼낸 토사를 지금의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종합시장 일대에 쌓아둬 생긴 언덕이 있었다. 맞은편인 동대문종합상가 일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가산(假山)·조산(造山)이라 불렀다. 토사 더미 언덕을 그냥 두기는 보기에도 흉하고 다시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갈 염려도 있어 무궁화 등 나무와 화초를 심었다. 조산동(造山洞)이라고 불려오던 이 지역을 1914년 서울의 지명을 새로 정할 때 꽃향기가 좋다 하여 방산동(芳山洞)으로 하였다.
조선 시대에 개천(開川)이라 부르던 청계천 준설은 조선왕조 후기의 국가적 대역사였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재위 1724~1776)의 장례를 준비하면서 “선대왕의 사업과 실적은 곧 균역(均役)·탕평(蕩平)·준천(濬川)”이라고 정리했다(정조 즉위년 5월 16일 실록 기사). 영조 재위 56년간 3대 치적으로 ▷백성의 부담을 고르게 하고 ▷당색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청계천을 준설한 것을 꼽은 것이다.
준설의 필요성은 1751년(영조 27) 한성판윤 박문수(1691∼1756)가 주청하여 영조가 직접 광통교에 나가 상황을 점검하고 주변 백성들 의견을 들었다. 주민들은 “사람이 말을 타고 광통교 다리 밑을 지나가는 것을 본 적도 있는데 지금은 다리와 바닥이 맞닿아 있습니다. 작년에 파내긴 하였으나 1년 만에 또 이렇게 됐습니다”하고 시급함을 아뢰었다.
영조실록 부록에 실린 영조의 행장(行狀; 죽은 이의 일대기)에는 그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36년(1760) 경진 춘 2월에 준천하였다. … 『여지승람』에 개천(開川)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세종 때에 이선로가 더러운 물건을 투입하는 것을 금하여 명당의 물을 맑히기를 청하고, 집현전 교리 어효첨이 상소하여 그 형세가 행할 수 없는 것이라 배척하였는데, 세종께서 어효첨을 옳게 여기고 이선로의 말을 채용하지 않으셨다. 역대에서 세종 때의 일을 존중하고 믿어서 드디어 (개천의) 바닥을 쳐서 (물을) 소통시키는 일을 모두 거행하지 않은 것이 또한 300여 년이 되므로 내[川]가 점점 막혀서 둑과 높이가 거의 같아져 장마 끝에는 이따금 넘치는 재앙이 있었다. 왕께서 … 여러 번 … 뭇 백성에게 물으셨는데, 모두가 쳐내는 것이 편리하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이 백성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어찌 백성의 힘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하고, 많은 돈을 내어 일꾼을 사서 쳐내게 하되 재촉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나 몇 달 안 가서 공역이 끝났다. 그래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 해마다 준천하는 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비용이 가장 큰 숙제였다. 국론을 모으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논의와 준비에 7년이 걸렸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760년 2월 18일 본격 준설을 시작해 57일 만인 4월 15일에 끝냈다. 공사에는 21만5380명의 백성이 참여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3300여명은 품삯을 받고 일했다.
공사 중이던 3월 10일 왕이 오간수문에 나가 준설 작업을 직접 참관하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풀며 격려했다. 그때 그린 그림이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인데 준설사업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묶은 『어전준천제명첩(御前濬川題名帖)』에 실려있다. 그림을 보면 개천 바닥에서 인부들이 삽·가래 등으로 토사를 파는 한편 소가 끄는 써레로 밀어 옮기는 작업을 하고, 양쪽 둔치에는 작업하는 사람들과 복장이 같은 사람 여럿이 음식상을 받고 있다. 왕이 참관한 것과 음식을 베푼 사실을 한 폭의 그림에 담으려다 보니 그렇게 그린 모양이다.
영조실록 4월 10일 기사에는 준설한 토사 처리와 관련하여 왕이 화를 낸 기록이 있다.
《임금이 봉조하 유척기(兪拓基)를 소견하고 준천 공사가 잘하는 일인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유척기가 말하기를 “준천을 해야 한다는 의논은 신이 늘 주장했습니다만, 모래를 운반하는 공역이 너무 커서 이를 어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몇만 명의 인부와 만여 냥의 재정을 들인다면 모래를 운반할 수는 있겠으나, 지금 이 모래를 모두 천변에 쌓아 두거나 길 위에 깔 경우, 모래는 흙과 달라 장마가 져서 냇물이 넘치면 천변에 쌓아 둔 모래가 저절로 무너져 내릴 수 있고 또 길 위에 깔아 놓은 것도 모두 내로 흘러 들어갈 것이니, 이제 비록 준천을 하더라도 내가 금방 다시 막히고 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망연자실한 모양으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가 보면 지혜롭다고 하고 어진 자가 보면 어질다고 하는 법인데, 경은 말하기를 좋은 일이 못 된다고 하겠으나 나는 말하기를 좋은 일이라고 하겠다. 이 뒤로는 단 한 삽도 대지 않아도 100년을 안심할 수 있을 것인데, 경은 수작에 방해가 되니, 그만 물러가라.” 하였다.》
비용을 추가로 조달하기 어려워 토사를 한곳에 옮겨서 산처럼 쌓았고, 뒷날 향기로운 산으로 이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