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1911년 청나라로부터 독립 선언했지만 중화민국과 러시아가 방해
러시아내전 중 백군장군 웅가른슈테른베르크가 점령해 ‘대칸’ 올라
몽골 복드 칸, 자리 되찾으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 도움 요청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 들어섰지만 숙청-집단농장화로 가난 악화
러시아 혁명과 내란의 역사에서 가장 황당한 사건이 1921년 몽골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이른바 혁명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수립한 일이다. 이 임시정부는 1924년 11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몽골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몽골인민공화국은 1922년 12월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들어선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다.
청나라는 몽골을 분할 통치했다.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일찍이 후금과 연합을 이룬 지역은 내몽골, 끝까지 버티다 강희제 때 복속한 지역은 외몽골로 불렀다. 내몽골의 몽골인들은 청나라 군대조직 8기 중 하나를 이뤘다. 그 뒤 275년간 청나라의 통치가 계속되다 1911년 10월10일 중국에서 우창(武昌)봉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그해 12월29일 외몽골의 8부 부족 지도자가 모여 청나라로부터 벗어났음을 선언하고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젭춘담바 후툭투 8세(1869~1924)를 국가지도자, 즉 대칸으로 추대했다. 젭춘담바 후툭투 8세는 군주가 되면서 복드 칸으로 불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러시아 제정이 붕괴되자 중국은 외몽골의 자치권마저 철폐하고 안휘파 군벌인 단취루이(段旗瑞, 1865~1936)의 부하인 쉬슈정(徐樹錚, 1880~1925)을 외몽골의 수도 우루가에 보내 복드칸의 궁전을 무장병력으로 포위하고 자치권 반납을 압박했다. 결국 1919년 11월 중화민국 대총통령으로 외몽골 자치권 철폐를 공포했으며 1920년 1월 2일 몽골 전역을 점령하면서 복드 칸 정권은 사실상 실권을 잃었다.
하지만 그해 말 사건이 벌어졌다. 시베리아 지역에서 러시아 내전을 치르던 백군 소속의 로만 표토로비치 웅게른슈테른베르크(1886~1921)가 부대를 이끌고 몽골에 들어왔다. 웅게른슈테른베르크는 러시아의 군인이자 남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며 러시아 혁명 와중에 혁명에 대항한 백군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몽골에 들어와 수도 우르가에 진주해 있던 중화민국 군대를 격퇴하고 1921년 2월에는 복드 칸을 복위시켰다.
이로써 웅게른슈타인베르크는 몽골에서 일시 ‘해방자’로 숭앙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욕심이 발동했는지 복드 칸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대칸의 자리에 앉았다. 자칭과 타칭을 합쳐 몽골 역사상 대칸의 자리에 오른 인물 가운데 유일한 백인 혈통의 인물이다. 군대로 몽골을 일시 점령해 대칸을 참칭한 인물일 뿐이라며 그를 대칸으로 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군사력을 갖춘 그에게 아무도 대항하지 못했다.
이렇게 에스토니아에서 성장한 웅가른슈테른은 러시아의 수도인 페드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이름)로 이주했다.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파블로프스크 군사학교를 마치고 시베리아에 파견됐는데 그때 접한 몽골족과 부랴트족에 흥미를 갖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대대적으로 충돌한 갈리시아(지금의 폴란드 동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북부를 포괄하는 지방)의 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에서 참전했다. 당시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용감하고 과감하긴 하지만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군주제가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서면서 러시아 동아시아지역으로 파견됐다. 당시 이 지역은 바이칼호 부근의 카자크 기병대 사령관 출신인 그리고리 세묘노프(1890~1946)가 지배하고 있었다. 세모노프는 10월 혁명 이후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을 조직해 볼셰비키에 저항했다. 귀족 출신인 웅가른슈테른도 세묘노프의 백군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중장까지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웅가른슈테른베르크는 티베트 불교에 심취해 자신이 부처라는 망상에 빠졌다. 주변에서도 그런 그를 부추겼다. 환생을 적극적으로 믿는 티베트 불교에 교리에 맞춰 부하들은 아부의 발언을 쏟아냈다. 부하들은 그를 ‘칭기즈 칸의 환생’이라며 앞으로 중국과 만주, 티베트를 점령해 과거 몽골 제국에 버금가는 광활한 제국을 세울 것이라고 아첨을 해댔다. 달콤한 아부를 즐기면 자신을 망치게 되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는 주변의 아부 속에 더욱더 깊은 망상에 빠진 듯하다. 몽골의 전통을 부활해야 무사의 기상이 생긴다며 도시에 살던 주민을 초원으로 내쫓아 유목 생활을 재개하도록 강요했다. 환생해서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며 주민을 마구 살해했다. 중국인이나 러시아 혁명에 동조하는 몽골인은 물론 러시아에서 흘러들어온 유대인까지 마구 죽였다. 독실한 티베트 불교도를 모아 자신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학살을 지휘했다. 몽골 초원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1921년 3월 볼셰비키 혁명에 동조하며 몽골 인민당을 결성한 몽골인 담딘 수흐바타르(1838~1923)과 허를러깅 처이발상(1885~1952) 등이 러시아와 몽골 접경도시인 캬흐타에서 중국인을 내쫓고 몽골 임시인민정부를 수립했다. 몽골 역사에서 1차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를 두고 러시아 밖에서 벌어진 첫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복드 칸은 이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대칸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과거의 지배자는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에게까지 손을 내민 군주의 모습이다.
몽골인민당 수뇌부는 이들은 400인의 의용군을 이끌고 백군 공격에 나서면서 러시아에서 내전을 벌이고 있던 소비에트 적군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은 700명으로 늘어난 몽골의용군과 몽골에 들어온 소비에트 적군, 그리고 1920년 4월 극동지역에 세워진 볼셰비키의 위성국가 극동공화국(치타 공화국이라고도 함)의 군대를 합쳐 1만 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이들은 1921년 웅게른슈타인베르크의 백군을 제압하고 수도 우르가를 점령했다. 웅가른슈테른베르크는 사로 잡혔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1917년 12월에 조직한 소비에트 비밀경찰 체카는 웅가른슈테른베르크를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에 끌고 가 군사재판을 거쳐 총살했다. 그를 체포한 직후 레닌은 군사법정에 ‘그의 죄상은 너무 명백하니 신속하게 총살에 처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을 정도다.
러시아 적군과 몽골인민당의 도움으로 복드 칸은 대칸 자리를 되찾았다. 1924년 복드 칸이 세상을 떠나자 임시인민정부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그해 11월에 몽골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몽골은 이를 2차 혁명으로 부른다. 몽골인민공화국은 1922년 12월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들어선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가 됐다. 수도인 우르를 울란바토르로 이름을 바꿨다. '붉은 영웅의 땅'이라는 뜻이다.
당시 소련이 세운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은 극좌노선을 추구하고 있어 몽골인민공화국도 이를 따랐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1928년 열린 몽골인민혁명당의 제7차 당대회에선 우파를 추방한다며 대대적인 당내 숙청을 강행했다. 몽골인민당의 역대 제1서기와 역대 총리 중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드물었을 정도다. 총살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대숙청을 지도한 사람도 숙청돼 총살대에 올랐을 정도다.
몽골은 소련 해체 뒤인 1992년 2월 13일 일당독재와 계획경제 체제를 폐지하고 다당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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