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도편추방이 그리 사악한 제도는 아니었다. 도편추방을 발의한 사람 역시 투표 대상에 포함됐다. 섣불리 발의했다가는 자기가 추방될 수도 있었던 거다. 남용을 막는 장치였다. 도편추방 제도가 실시된 90여 년 동안 추방된 건 고작 열 명뿐이었다. 추방된다고 명예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었다. 시민권과 재산권은 유지됐고, 시간이 지나면 재기가 가능했다. 그저 웃자란 가지를 쳐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의 한 방식이었다.
공론화위가 입증한 시민의 직접민주주의 수행 능력
빈사 상태의 대의민주주의 되살리는 시대정신이다
물론 광장의 엇나간 집단사고도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인간 광우병’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수개월 동안 나라를 마비시켰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권력을 국민한테서 위임받은 정치 엘리트들의 오만과 직무유기가 기름을 끼얹은 것이다. 국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대신 “내가 죽을 거 주겠어? 그냥 주는 대로 먹어”라는 식의 안하무인에 분노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촛불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촛불로만 잘못이 바로잡힌다면 그런 불행도 없다. 촛불이 켜지기 전에 바로잡을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국민발안’ 같은 직접민주주의인 거다. 누누이 말하지만 직접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다.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란 말이다. 대리인이 일을 안 하면 주인이라도 일을 대신 해야 하는 거다. 계약기간 동안 자를 수 없다고 계약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순 없지 않겠나.
얼마 전 우린 또 하나의 희망을 봤다. 원전 공론화위원회 말이다. 대통령 지시로 만들어져 정부 탈원전 정책 추진의 들러리가 될 거라는 합리적 의심을 극복하고 신고리 5·6호기 원전 공사 재개라는 집단지성을 발휘했다. 그것이 시민의 힘이다. 국회에서 공전 중인 개헌 논의조차 공론화위에 맡기자는 주장까지 곳곳에서 나오는 이유다.
공론화위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중간쯤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지만 직접민주주의를 수행할 수 있는 시민의 힘은 충분히 입증했다. 시민이 토론과 숙의로 정치 전문성을 높인다면 갈등요소가 많은 주제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수많은 국가적 과제가 국회로만 가면 정쟁으로 변질되는 현실과는 못내 다르다. 매번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의 절반을 물갈이해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
이제 주인이 직접 나서 이런 의원들에게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 고대 아테네에서 교양과 체육 교육을 받은 시민에게 ‘칼로스카가토스(아름답고 선한)’라는 수식어를 붙여줬다. 당당히 주권을 행사하는 시민사회의 주역이 됨을 의미했다. 이제 대한민국 시민이 모두 칼로스카가토스가 돼야 한다. 도편추방이 당시 참주의 등장을 막기 위한 시대정신이었던 것처럼 직접민주주의도 빈사상태의 대의민주주의를 되살릴 수 있는 시대정신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