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청사 미술품 '도약' 전시 교체로 본 외교와 예술
이 작품은 세로 12m, 가로 2.5m 크기의 ‘도약(Jump)’이라는 제목의 유화다. 2002년 12월 외교부가 새로 지어진 정부중앙청사 별관 청사로 이전할 때 행정자치부가 대한미술협회에 특별히 의뢰, 2억5000만원을 들여 제작했다. 서양화가 오승우 화백의 작품이다.
2002년 2억5000만원 들여 설치
윤영관 장관 경질, 김선일씨 피살 …
작품 건 뒤부터 잇단 흉흉한 사건
다른 방향 뛰는 20마리 ‘말 탓’
“기운 흩어놓아 외교부 우왕좌왕”
2004년 반기문 장관 “그림 바꿔야”
훼손 보수 명목 떼내기로
“검사 결과 작품 일부 가루화
다른 곳으로 옮겨 필요한 조치”
4000점 그림부자 외교부
장관 집무실 옆 산수화 5억 최고가
유화 ‘농원’ 외빈과 사진 단골 배경
곧 사라질 ‘도약’을 바라보는 외교부 사람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스무 마리의 말이 갈기를 날리며 힘찬 몸짓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사실 부 내에서 ‘혼비백산도’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다. 공교롭게도 작품을 건 직후부터 외교부에 흉흉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 용산기지 이전 협상 당시 청와대가 “북미국이 미국에 편향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문책하며 표면에 드러난 이른바 자주파-동맹파 갈등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2004년 1월 노무현 정부의 초대 외교장관인 윤영관 장관이 경질됐다. 2004년 6월에는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적 충격은 정부의 외교력 부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과 맞물리며 거센 반미 감정까지 일었다.
이를 즈음해 외교부의 ‘말 탓’이 시작됐다. 이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쳐들고 달리는 말들이 외교부의 기운을 흩어놓는다”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금 외교부의 모습이 작품 속 말들 같다” 등의 수군거림이 나왔다.
반기문 장관(2004년 1월~2006년 11월 재임)이 2004년 8월 기자간담회에서 “객담이지만 말들의 방향이 제각각이어서 어디로 갈지 방향을 못 잡는 것 같다. 이 그림 대신 꿈을 꾸게 하는 그림을 갖다놔야 하는데”라고 말했을 정도다. 2층 메인 로비의 정면에 걸려 청사에 들어오는 이들의 첫 시선을 사로잡곤 했던 그림이 1층으로 내려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외교부는 그림을 떼려고도 해봤지만, 행자부가 계약한 전시 기간이 남아 있어 불가능했다. 그러자 그림의 기를 누르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이뤄졌다. ‘조·미 수호통상조약’ 등 중요 외교문서를 전시물로 만들어 그림 주변에 배치했다. ‘순국선열’까지 등장했다. 지금은 2층 로비에 전시된 헤이그 특사 사진 액자, 외교부 순직자 명단을 새긴 동판 등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에선 ‘도약’의 명예회복을 시도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약진하는 말처럼 국운을 높이자는 본래 취지가 다시 부각됐다. 외교가에선 ‘혼비백산도’ 대신 ‘각개약진도’라는 새로운 별명도 지어 줬다.
‘도약’은 곧 사라지지만 외교부 청사에는 웬만한 미술관에서도 보기 힘든 명작들이 여럿 숨어 있다. 외빈들이 많이 찾는 외교부의 예술품은 한국을 알리고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는 외교 수단 역할을 한다.
다른 나라 외교부 청사는 어떨까. 워싱턴에 있는 미 국무부 청사 로비에 들어서면 성조기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국기가 게양된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장관실과 부장관실이 있는 청사 7~8층에는 역대 장관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도쿄에 있는 일본 외무성 청사 1층 로비에는 외상의 활동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뒤뜰에는 존경받는 외교관 동상 등이 세워져 있다.
한국 외교부 청사에는 초상화나 동상이 없다. 대신 18층 리셉션홀 뒤쪽 벽면에 역대 외교부 장관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큐레이터 출신인 선승혜 문화교류협력과장은 “유교 문화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조선시대 때 왕들이 신하들을 치하하기 위해 관복 초상을 하사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18층의 장관들 사진이 ‘현대판 관복 초상’인 셈이다.
[S BOX] 책장 그린 병풍 ‘책가도’ 강경화 장관 공관에 새로 설치
변화는 입구부터 시작됐다. 공관을 찾는 외빈들이 직접 메시지를 적는 방명록이 놓여진 탁상 뒤로 중요무형문화재 118호 불화장 보유자인 임석환씨의 책가도(冊架圖·책 등이 책장에 가지런히 진열돼 있는 그림·사진) 병풍이 들어섰다. 조선 시대 때 정조(재위기간 1776~1800년)가 왕의 권위를 상징했던 일월도 대신 책가도 병풍을 뒤에 뒀다. 17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서재를 그린 ‘스투디올로’가 청나라로 넘어왔고, 정조가 이를 조선에 도입했다. 장관 공관에 이 작품이 들어온 것도 국제화를 지향했던 정조의 정신을 되새기는 의미라고 한다.
무거운 느낌의 추상화는 일부 들어냈다. 수묵화로 도시적인 서울 풍경을 담은 박병일 작가의 ‘Breath-여의도’ 등이 새로 배치됐다. 외교부 관계자는 “공관은 고위급 외교가 이뤄지는 공간으로 강 장관이 편안하게 느끼며 외교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