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레이스카와 양산차의 간극이 큰 월드랠리챔피언십(WRC) 우승과는 결을 달리하는 성과다. i30 N TCR은 제조사의 측면에선 양산차 개발과의 상호 피드백을 통해 숙련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이고, '판매용 레이스카'인 만큼 일반 소비자의 측면에선 각종 국제대회 규정을 만족시키는 국산 레이스카의 등장을 뜻한다.
그런데 시험무대와도 같았던 첫 국제대회 데뷔 무대에서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을 거둔 것이다. 별 탈 없이 완주만 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자리에서 i30 N TCR은 보기 드문 '추월쇼'를 펼치며 포디움에 올랐다.
[TCR, '보는' 모터스포츠에서 '참여하는' 모터스포츠로]
WTCC에 참가하기 위해선 팀뿐 아니라 드라이버 개인의 입장에서도 금전적인 부담이 크다. 차량에 대한 다양한 개조가 가능하다보니 경제력에 따라 차량의 퍼포먼스가 큰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WTCC 대표 출신인 마르첼로 로티는 WTCC 대비 비용을 대폭 줄인 TCR에 대한 구상을 2014년 발표했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대회가 개최됐다. 이같은 TCR의 등장은 많은 모터스포츠 매니아들의 참여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낮은 진입장벽과 공정한 경쟁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만큼, TCR은 기술규정(Technical regulations)을 통해 차량의 출력과 구동방식, 중량뿐 아니라 크기와 도어 수 등을 제한하고 있다. 출력이나 중량 등은 기존의 모터스포츠에서도 클래스를 구분짓는 중요한 기준이지만, "4도어 또는 5도어의 최소 전장 4.2m, 최고 전폭 1.95m"와 같은 규정은 다른 레이스에서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다.
이같은 규정과 더불어 터보차저가 장착된 최대 2리터의 휘발유 또는 경유 엔진에 최고 출력 350마력, 최대 토크 420Nm, 1250kg의 최저중량 등을 만족하는 차량은 TCR이 '핫해치 세계대전'으로 불리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깍두기' 한국 레이스카, 반찬서 주요리로 등극하다]
이같은 쟁쟁한 경쟁자들의 틈바구니에서 i30 N TCR은 내년도 TCR 인터내셔널 시리즈 데뷔를 앞두고 실전 테스트에 나섰다. 테스트 성격으로 나온 만큼 '임시 호몰로게이션(Homologation, 공인 인증)'을 받아 출전한 i30 N TCR은 총 2대. WTCC 챔피언 출신의 베테랑 드라이버 가브리엘 타퀴니와 알랭 므뉘가 각각 스티어링휠을 잡았다. 베테랑 드라이버들이고, 그간 i30 N TCR의 개발 프로젝트에도 관여해왔지만 실질적인 대회 준비 기간은 매우 짧았다. 경기를 한 주 앞둔 상태에서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이번 중국 대회를 위한 새로운 섀시의 테스트에 나섰던 이틀이 전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퀴니와 므뉘 두 드라이버와 두 대의 i30 N TCR의 퍼포먼스는 7일 오전 진행된 연습주행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1차 연습주행에서 타퀴니와 므뉘가 각각 2, 3위를 차지한 것이다. 폭스바겐의 골프 GTI TCR을 모는 롭 허프와의 격차는 0.1~0.2초 이내. 2차 연습주행엔 므뉘만 홀로 나서 1분 33초 725의 기록으로 1위에 올랐다. 2위와의 격차는 0.487초로, 눈에 띄는 성적을 거뒀다.
이날 오후 열린 1차 예선에서 므뉘와 타퀴니는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두 선수는 각각 1분 32초 811과 1분 32초 935의 랩타임을 기록해 1분 33초 279의 3위와 랩타임 격차를 벌렸다.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두 선수는 2차 예선에 나서진 못했다. 각 라운드별 포인트를 합산하는 시즌 포인트 경쟁이 막바지였던 만큼 이들은 '임시 호몰로게이션'으로 출전했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승 경기에서의 폴포지션을 비롯한 상위 그리드는 기존에 시즌을 진행중이던 선수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깍두기'처럼 테스트 주행에 나섰던 i30 N TCR은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 '깍두기'가 갑자기 메인 요리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깍두기'여서 더욱 빛난 진가]
므뉘가 피트스루 페널티로 고전하는 사이, 타퀴니는 19랩(바퀴) 동안 선전을 거듭했다. 14위로 출발한 타퀴니는 경기 초반의 혼선을 틈타 추월을 거듭하며 첫 랩만에 6위에 올랐고, 두번째 랩에선 추가로 2대를 추월해 4위를 차지했다. 타퀴니의 '추월쇼'는 3랩째에도 이어져 3위에 올랐고, 6랩째 타퀴니는 2위를 차지하며 선두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11랩째, 타퀴니는 선두 페페 오리올라(루크오일 크래프트-뱀부 레이싱·세아트 레온 TCR)를 잡고 선두에 올랐고, 마지막 19랩까지 그 누구도 타퀴니를 추월하지 못 했다. 1위를 차지한 타퀴니와 2위 장-카를 베르네이(레오파드 레이싱팀 WRT·골프 GTI TCR)과의 격차는 1초 626으로, 타퀴니는 우승과 함께 1분 33초 924라는 결승 1경기 패스티스트 랩도 달성했다. 므뉘는 피트스루 페널티의 영향으로 12위로 경기를 마쳤다.
결승 1경기의 우승을 차지한 타퀴니는 "현대와 팀, 나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정말 최고의 주말이다. 우승을 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 했다"며 "나의 카레이서 커리어에 있어 최고의 기억 중 하나로 남게 될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연습주행과 예선주행 도중 오일 라디에이터에서 발생한 문제로 인해 결승에 앞서 걱정이 있었다"면서도 "다행히 결승 경기에선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 모두를 추월하고 선두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결승 2경기의 이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두 차량과 선수는 선전을 이어갔다. 경기 초반 차량간 거친 몸싸움 잇따른 가운데, 므뉘는 차분한 주행을 이어가며 7랩째 5위에 올랐고, 타퀴니는 그 다음 랩에 7위에 올랐다. 두 선수는 서로 페이스를 높여가며 차례로 추월을 이어갔고, 므뉘와 타퀴니는 각각 4위와 6위로 경기를 마쳤다. 다른 차량들보다 더 무겁고, 출력은 더 낮은 차량을 갖고서 상위권에 오른 것이다.
[멈출줄 모르는 TCR의 확산세와 우리나라 모터스포츠]
TCR의 이같은 확산세는 매서울 정도다. 중국뿐 아니라 베네룩스(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역, 이탈리아, 포르투갈, 미국, 태국, 독일, 스페인, 라틴아메리카(멕시코, 도미니카공화국,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지역, 스칸디나비아·발틱·중동 지역까지 잇따라 국가 또는 지역 내 TCR 대회 개최가 결정됐다.
이같이 TCR 대회가 새로 생겨나거나 기존 자국 내 대회가 TCR과 합쳐지는 등 TCR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뿐 아니라 명성 높은 국제대회에서도 TCR 스펙 차량의 출전이 가능해지는 등 간접적인 영향력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FIA가 2015년 TCR 규정을 'TCN-2'라는 이름으로 반영·적용시킴으로써 TCR 스펙 차량의 FIA 주관 대회 출전이 가능해진 것. TCR 출전 차량을 대회에 유치해 양적·질적 향상을 꾀하려던 시도다. 이에 TCR 스펙 차량은 TCR 외에도 ETCC(유러피언투어링카컵), 우리나라의 최장한, 강병휘 선수가 선전하고 있는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 레이스, VLN, 수퍼 타이큐 시리즈 등에도 출전이 가능해졌다.
이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FIA 규격을 만족시키는 '커스터머 레이스'의 이점을 한껏 활용한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제조사가 직접 팀을 꾸리는 매뉴팩처팀의 출전을 막음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정한 환경 속에 레이스를 벌일 수 있는 환경도 한 몫을 했다.
여기에 한국 브랜드가 직접 TCR 레이스카를 생산·판매하면서, i30 N TCR의 승전보가 곧 TCR의 한국 진출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과거 TCR 아시아 시리즈 경기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점 역시 이같은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있다.
[TCR의 강력한 흡수력과 통합력…, 독일까 득일까]
TCR은 현지에 직접 TCR 타이틀이 붙는 대회를 열거나, 현지에서 기존의 입지가 단단한 대회 속에 한 클래스로 스며드는 방식으로 확산해왔다. 전자의 경우도 후자의 경우도 한국에선 쉽지 않은 방식이다. 대형 모터스포츠 대회를 이끌어갈 스폰서가 소수인 상황에서 추가적인 스폰서의 등장 없인 새로운 대회가 안정적으로 꾸준히 개최될 수도 없다.
또, TCR 스펙의 차량은 FIA 기준을 충족하는 차량으로서 다양한 국제대회에 참가가 가능하지만 기존 TCR이 국내 대회의 다른 클래스와 통합 운영되기 위해선 국내 규정의 개정이 불가피하다. 주최 측은 주최 측대로, 스폰서 측은 스폰서 측대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가 명확하다. 규정 등의 개정을 놓고 모든 논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면 좋겠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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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인 소비자가 개별적으로 반입한다면 될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차량과 파츠 등의 생산이 해외에서 이뤄지고 있고, 이는 곧 메인터넌스 비용의 증가로 이어진다. 또, '커스터머 레이싱' 본래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알아서 가져오라." 말은 간단하다. 구형 F1 머신도 그렇게 반입하면 될 일이다. 그러한 주장대로라면 우리나라에서 못 탈 차가 없다. '개별적인 반입'을 그저 '개인이 하면 될 일'로 치부해선 안 되는 이유다. 그것도 자국 브랜드가 자랑스럽게 국제 무대에 내놓은 자동차를 사는 일인데 말이다.
i30 N TCR의 선전과 내년도 시즌 본격 출격은 분명 반갑고도 축하할 일이다. 다만 i30 N TCR을 국내 모터스포츠의 발전으로도 이끌려 한다면 감상에만 젖어서 될 일일까. 우승 소식으로 "괜찮은 차가 없는데 뭐"와 같은 푸념의 여지는 줄어든 셈이다. 이제 차를 만든 현대차도, 대한자동차경주협회도, 국내 모터스포츠 프로모터도, TCR에 관심을 갖는 팀이나 드라이버 모두, 각 층위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