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가 ‘세계 제1의 키스’를 한 이 여인은?

중앙일보

입력 2017.10.11 16:19

수정 2017.10.1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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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여성관은 나이와 상대의 신분, 심지어 국적도 초월해 있었다. 봉건 시대 황제의 후궁관과 비슷했다. 말년에도 그는 항상 여성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여성에게서 삶의 활력을 찾으려 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남자는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색을 탐한다는 한국 속담이 그렇게 맞아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는 일세를 풍미한 중국 혁명의 영웅이었지만 내면세계의 한 언저리에는 항상 이성에 관심을 쏟은 범부이기도 했다.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
중화민국 시절 외교관과 농상부 고위 관리를 역임한 왕즈창(王治昌)의 딸이다. 1921년생으로 마오쩌둥보다는 무려 28살이 어리다. 베이징에 있었던 푸런(輔仁)대학 이과연구소에서 과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당시 베이징 시 당 위원회를 맡고 있던 추이웨리(崔月犁)과 교류하게 된다. 그리고 1946년 옌안으로 간다. 

양광메이 [사진 차이나닷컴]

왕은 명문가의 전형적인 규수였다. 외모는 우아하고 귀족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가 옌안에 오자마자 뭇 장병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밖에. 마오 역시 그를 보자마자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마오는 그를 불러 사적인 대화를 많이 나눴고 왕의 미모와 우아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본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의 질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장의 질투에 두려움(?)을 느낀 마오는 왕을 류샤오치(劉少奇)에게 소개했고 둘은 1948년 결혼했다. 마누라 무서워 훗날 정적이 된 류에게 자신의 사랑을 양보한 것이다. 당시 마오의 속이 얼마나 쓰렸을까. 그렇게 왕은 류의 다섯 번째 부인이 된다. 

1963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류샤오치와 양광메이 [사진 차이나닷컴]

일반적인 신세대 여성들과 달리 왕광메이는 일부종사(一夫從事)를 고집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모에 현모양처 형인 그의 매력은 곧바로 국내외 관심을 받았다. 마오쩌둥은 그런 왕을 좋아했고 격의 없이 대화도 나눴다. 그때마다 장칭의 질투는 극한에 달했다. 문혁이 일어나자 장칭은 왕광메이를 죽이려고 했다. 그때마다 마오쩌둥은 군에 왕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혁명 전우인 류샤오치 부인에게 조차 연정을 끊지 못했던 마오. 그 마음 속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왕광메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군권까지 동원했을까.    

학생 시절 양광메이 [사진 차이나닷컴]

문혁 과정에서 남편 류샤오치가 홍의군에게 처참하게 생을 마감하자 그는 권력과 인생에 대한 허무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봉사와 빈자를 위한 삶의 역정을 이어간다. 1995년 ‘행복 공정(프로젝트)’을 만들어 중국 전역을 돌며 극빈층 구호활동을 시작했다. 실적은 대단했다. 2006년까지 행복 공정은 전국에 389개 극빈 어머니 돕기 센터를 개설했다. 투자된 돈만 3억 1000만 위안(약 535억원), 도움을 받은 빈곤 어머니 가정은 15만 4000호, 수혜 인구는 69만 5000명에 달했다. 중국 정부는 그의 이 같은 빈자 구호 활동을 기려 ‘중화인구장(中華人口奬)’ 영예를 수여했다. 2006년 10월 베이징에서 눈을 감았는데 향년 85세. 중국 정부는 그의 빈곤 퇴치 업적을 찬양하며 ‘성취장(成就奬)’을 수여했다.  
생활 비서, 장위펑(張玉鳳)
1944년 동북 무단장(牧丹江) 빈민가 태생이다. 마오쩌둥과는 나이차가 51세. 손녀 뻘이다. 집안 여덟 자매 중 넷째. 집안이 학교 다닐 형편이 안 됐다. 그래서 택한 게 화물 열차의 승무원. 주로 식당차에서 일했다. 1958년 일이다. 그에게 행운이 돌진한 건 1962년. 갑자기 마오쩌둥 전용 열차 승무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1967년 철도부에 근무하는 류아이민(劉愛民)이라는 남자와 결혼도 했다. 한데도 마오는 열차 내에서 예쁘고 싹싹한 장만 찾았다. 1970년 7월, 마오는 그을 중난하이(中南海)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직책은 말도 생소한 ‘생활 비서.’ 마오를 부축해 그의 사생활을 챙기는 ‘시중 비서’다. 그리고 훗날 기밀 비서까지 꿰차며 노년 마오쩌둥의 모든 일상을 챙긴다. 황제 옆에서 황제를 돌보는 비서, 즉 안방 문고리 권력이 된 것이다.

마오의 철도 비서 시절 장위펑 [사진 차이나닷컴]

마오는 장위펑을 매우 아꼈다. 그의 성격이 부지런하고 직선적이며 쾌활한 세 번째 부인 허쯔전을 닮아서다. 말년의 마오는 부인 장칭을 매우 싫어했다. 주변에 자녀도 없었다. 그래서 매우 고독했다고 한다. 절대권력을 가진 마오는 장위펑에게 자신의 권력의 30%를 양보하고자 했다. 한 번은 장위펑의 손님 접대하는 태도가 좀 게을렀다. 마오가 화를 내자 장위펑도 덩달아 화를 냈다. 마오쩌둥의 말을 반박하더니 아예 그의 손을 뿌리치고 사무실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장위펑이 떠나자 마오는 종일 차도 안 마시고 업무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매일 ‘장위펑’이라는 세 글자만 썼다. 후에 왕둥싱이 다시 장위펑을 설득해 데리고 왔다. 이때 마오는 장위펑에게 이런 글을 써줬다. ‘성실하게 일하고 책임을 다하라.’ 이후 삼국지 장비의 후예인 장위펑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다. 마오가 얼마나 장위펑을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오의 기밀비서 시절 장위펑 [사진 차이나닷컴]

마오는 권력의 지존이었다. 평생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통의 생활 비서인 장에게는 별 도리가 없었다. 노년의 마오는 장에게 너무 많이 의지했고 감정마저 빼앗긴 상태였다. 마오쩌둥이 죽자 장칭은 부인 자격으로 마오 주석의 사적 재산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런데 장칭이 장위펑에게 마오의 개인 소형 금고 열쇠를 달라고 하자, 뜻밖에도 장위펑은 “주석의 남긴 모든 것은 당과 국가의 재산입니다. 만약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자 한다면 화궈펑 주석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한 게 아닌가.

마오쩌둥의 여성관, 나이·신분·국적도 초월해
유부녀, 생활 비서, 타국 전 영부인까지

이에 장칭은 펄펄 뛰며 화를 냈다. 이후 장위펑은 화궈펑 주석을 찾아가 마오가 남긴 문건들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화 주석은 장의 얘기를 듣고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장칭의 재산 정리를 막았다. 마오쩌둥 말년의 비서이자 최고의 심복이었던 장위펑의 상황 인식과 정세 판단은 마오 사후 중국 정국 안정과 국가 기밀 보호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가방끈은 짧았지만 장의 지혜는 절대 권력의 비서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오는 그런 장에게 반해 자신의 노년을 의탁하고 기대하고 또 마음을 줬다.

노년의 장위펑 [사진 바이두백과]

마오가 죽자 그는 중난하이를 떠나 국가 제1 자료 보관실에서 일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첫 직장이었던 철도부로의 복귀를 희망했다. 그리고 만년을 평범한 철도부 간부로 퇴직했다. 올(2017년)73세인 장은 서예를 즐기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는 서예를 즐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오 주석을 처음 만났을 때 서예를 하고 있었다. 그의 필치가 어찌나 힘이 있고 아름답던지 경외의 맘이 우러나왔다. 그래서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마오 주석이 옆에서 많은 지도를 해주셨다. 주석은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서예에 빠진 이유다.”
세계 제1의 키스, 이멜다 마르코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 부인이다. 마오쩌둥과 무슨 연정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아닌 모양이다. 1953년 미스 필리핀 출신인 이멜다는 필리핀이 자랑하는 최고의 지적 미인이다. 그의 좌우명은 “항상 입가에 미소를 걸고, 눈물은 영원히 심장 깊숙이 숨기자”였다. 화사한 미소보다 더 강한 여성의 매력, 힘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눈물이라는 가장 강력한 여성의 무기 대신 그는 매력에 집착했다. 그는 농염미와 규수의 풍모를 동시에 가진 미인이었다. 또 성격이 강해지는 걸 싫어했던 여걸이기도 했다. 마오는 그런 이멜다는 만나고 싶어 했다.

이멜다 마르코스에게 세기의 키스를 하는 마오쩌둥 [사진 차이나닷컴]

1974년 9월, 중국을 방문한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가 마오쩌둥을 만났다. 당시 마오는 온몸에 병색이 짙어 거동도 제대로 못했다. 그러나 국가 원수로서 마르코스 부부의 예방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마오는 접견실에서 선채로 마르코스 부부를 맞았다. 이멜다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설 때 마오의 창백한 안색이 갑자기 밝아지고 눈은 빛나기 시작했다. 순간 마오 옆에 있었던 영부인 장칭은 눈살을 찌푸렸고 눈에서는 질투의 레이저가 발사됐다고 한다. 
 
마오의 기행(奇行)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이멜다의 손을 가슴까지 들어 올리더니 손등에 키스를 했다. 현장에 있던 수행원들이 뭐라고 반응을 보일 틈도 없었다. 기습 손등 키스를 받은 이멜다는 “전 너무 영광입니다”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당시 주변에 있던 사진사가 이 순간을 딱 한 컷 찍었는데 곧바로 전 세계로 전송됐다. 말년의 마오가 이멜다를 짝사랑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했다. 그리고 마오가 여성에게 키스하는 유일무이한 사진으로 남았다.  

이멜다 마르코스 [사진 차이나닷컴]

이후 이멜다는 부패한 마르코스 정권이 전복되면서 사치와 부패 등 혐의로 법정에 섰다. 마르코스 일가의 재산은 50억~100억 달러에 달했다. 유죄를 선고받은 그는 사면 후 정계를 떠났다. 올해 88세인 그의 저택은 아직도 왕궁을 방불케할 정도로 화려하다고 한다. 저택 거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한 장의 사진이다. 마오쩌둥이 그의 손에 키스를 한 사진이다. 사진엔 이런 설명이 달려있다. ‘세계 제1의 키스.’  마오의 연정을 이멜다도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차이나랩 최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