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세종실록의 1443년 12월30일자 기록엔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고 표현돼 있습니다. 그 전엔 한글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일 나라의 공식기관인 집현전 학자들이 주도해 한글을 만들었다면 창제 과정이 실록에 소상히 적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글은 세종이 혼자 몰래 만들었다?
집현전 등 조정 신료, 훈민정음 반대
가장 위대한 왕, 늘 공부했기에 가능
세종의 공부법 "질문하고 토론하라"
지식의 반감기 짧아지는 미래 사회
정보습득 아닌 역량 키우는 공부해야
유대인 하브루타도 세종과 같은 원리
이처럼 부정적 여론이 심각한 상황에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일을 집현전에 맡겼더라면 최만리와 같은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시작도 못해보고 끝났을 겁니다. 또 한글 창제는 한자 문화권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비쳐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죠.
이처럼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한글은 세종 개인의 치밀한 준비와 노력이 없었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업적 때문인지 만원권 지폐에 그려진 세종의 옷깃에는 한글 자모가 조그맣게 쓰여 있기도 합니다. 물론 위조 방지라는 실용적 목적도 있긴 하지만요.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창의성이 학습을 통해 길러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임금일 수 있던 건 ‘공부하는 임금’이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는 ‘경연’ 횟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선대인 태종 때는 재위 기간 18년 동안 60여 회에 불과했지만 세종은 32년간 1898회나 진행했습니다. 세종은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 지리, 역법에도 통달해 집현전 학사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공부하는 습관을 몸에 밸 수 있던 건 왕이 되기까지의 독특한 경험 때문입니다. 1418년 8월 태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4대 임금으로 즉위했지만 원래 그는 왕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왕세자로 책봉된 건 불과 두 달 전인 6월의 일이었죠. 보통 십수년씩 세자로서 왕위 수업을 받는 조선시대의 다른 왕들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 때까지 충녕은 무엇을 했을까요? 자신이 6살 때 세자로 책봉된 큰 형이 있었기에 일찌감치 왕권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했습니다. 특히 태종이 왕권을 얻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벌였던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부른 야망을 품기 힘들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둘째 형인 효령도 권력과는 거리가 먼 종교 활동에 매진했죠. 충녕이 할 수 있는 건 학문에 힘을 쏟는 일이었습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권력 관계에서 오는 중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오직 공부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충녕이 학문에 심취할 수 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갖고 있는 특유의 기질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고 탐구 정신이 강했죠. 유학의 경전인 사서삼경을 비롯해 농업,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고루 읽었습니다. 질문이 많아 스승을 귀찮게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임금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죠. 왕위 수업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임금에 올랐기 때문에 늘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궁금한 것은 찾아보고 물어보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세종의 의사결정은 회의를 통한 것이 63%, 명령이 29%였습니다. 반면 그의 아들인 세조는 명령이 75.3%, 회의가 20.9%였죠. 박 소장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군주였지만 모든 결정을 신하들과 의논해 내렸다”고 설명합니다. 세종은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으로 나눈 토지조세 제도를 실행하기에 앞서 무려 17년 동안 일반 백성 16만 명의 의견을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질문을 던지고 토론하며 경청하는 스타일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임금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같은 세종의 공부법은 과거 뿐 아니라 미래 사회에도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공지능(AI)으로 대표되는 4차 혁명 시대에는 공부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 사회에선 그 많은 지식을 모두 안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지식의 분야는 더욱 세분화 되고 반감기가 짧아지면서 평생을 쌓은 탑이 어느 한 순간 쓸모없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와 구글에 키워드만 치면 웬만한 전문지식까지 모두 쏟아져 나오는 시대엔 탑을 얼마나 높이, 크게 쌓느냐는 과거처럼 중요하지 않은 거죠.
결국 앞으로의 공부는 지식과 정보를 쌓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기존의 정보를 취합해 인과관계를 만들고, 다른 분야와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과정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엔 쌓은 탑의 높이와 크기가 중요했다면, 4차 혁명 시대엔 탑의 도면을 얼마나 빠르게 잘 그린 후 탑을 적절하게 쌓을 수 있는지, 그 ‘축성’ 능력이 중요해진다는 겁니다.
이러한 4차 혁명 시대의 배움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세종의 공부법’입니다. ‘질문하고 토론하라’는 세종의 공부법은 미래 사회에 꼭 필요한 교육 방식입니다. 언제 없어질지도 모를 현재의 직업과 그 안에서 비롯된 전문 지식들을 주입하는 공부는 그만두고 스스로 지식의 탑을 쌓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내야 합니다. 국어·영어·수학 등과 같은 교과목 중심의 교육 시스템을 버리고 문제해결력과 창의성, 협업능력 등을 키우는 ‘역량’ 교육이 필요한 때입니다.
의학계에선 이미 AI 의사 왓슨(Watson)이, 법조계에선 AI 변호사 로스(Ross)가 자신의 업무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왓슨은 수십만 명의 환자 정보와 최신 의학 이론을 검색해 맞춤 처방과 진단을 내놓습니다. 로스는 수천만 페이지에 달하는 기존의 판례를 분석해 판결의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무수한 정보를 취합하고 통계를 활용해 산술적으로 조합하는 능력은 AI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대신 인간은 AI가 할 수 없는 더욱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세종처럼 새롭게 질문을 던지고, 타인과 교감하며 통섭할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것이 미래 교육의 핵심이 돼야 합니다.
‘하브루타’는 히브리어로 ‘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짝을 지어 모든 공부를 토론식으로 하는 ‘하브루타’에 익숙합니다. 가정에서 밥 먹을 때, 학교에서 공부할 때 등 모든 상황에서 질문하고 토론하죠. 이스라엘의 대학 도서관이 우리처럼 조용하지 않고 토론하는 학생들로 시끌벅적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전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2014년까지 노벨상 수상자의 22%(195명)를 배출한 이유도 ‘하브루타’의 힘이 큽니다.
이는 미국 행동과학연구소의 ‘학습 피라미드’ 이론으로도 설명됩니다. 연구소에 따르면 학습 후 24시간 뒤 기억에 남는 비율이 일방적 수업은 5%에 불과했지만, 토론(50%)과 체험·실습(75%) 등 참여형 학습의 효과는 매우 뛰어났습니다. ‘세종의 공부법’과 ‘하브루타’는 이 같은 여러 가지 학습 방식을 모두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효율성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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