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학자의 길 “中 금융이 살아야 中 경제가 살아난다”

중앙일보

입력 2017.10.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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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허난(河南)성은 흔히 중원(中原)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중국에서 2번째로 긴 황허(黃河)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허난이라고 부른다. 면적은 16만7천 평방킬로미터로 남한의 1.6배이며 인구는 2016년 현재 9532만명이다. 2016년 현재 국내총생산(GDP)이 중국에서 5번째로 많고, 중서부 지방을 통틀어 으뜸이다. 허난성을 이끄는 세푸잔(謝伏瞻) 서기는 원자바오 전 총리의 핵심 브레인 출신이다.  

세푸잔(謝伏瞻) 허난성 서기 [사진 이매진차이나]

그는 중국 정부의 양대 싱크탱크인 국무원 발전 연구 중심과 국무원 연구실에서 모두 25년을 보낸 거시경제 전문가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쑨예팡(孫冶方, 1908~1983)의 업적을 기리며 만든 쑨예팡 경제상을 2번이나 받았다. 그는 1954년 8월 중부 후베이(湖北)성 톈먼(天門)에서 태어났다.  

원자바오 전 총리 핵심 브레인, 컴퓨터 공학도 출신
中 국무원에서 거시경제 연구활동 25년간 이어와
허난성 서기 맡은 후 중위안은행, 중위안증권 만들어

후베이성 우한(武漢)의 명문대학인 화중공학원(현재 화중과기대학) 컴퓨터공학과에서 공부했다. 대학을 마치고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기술국에 들어갔다. 1986년 국무원 기계공업부 산하 기계과학연구원에서 산업자동화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9월 국무원 발전 연구 중심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판공청 주임을 거쳐 부주임까지 승진했다.  그는 2006년 4월 베이징대학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동안 정책 연구와 같이 실속 없는 일을 했다. 그러나 앞으로 기회가 있다면 실속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화중과기대학 [사진 위키피디아]

실속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희망은 반년 만에 현실로 바뀌었다. 추샤오화(邱曉華) 당시 국가통계국장이 중혼을 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낙마하면서 그가 긴급 투입된 것이다. 그는 20년(1986년~2006년)을 보낸 국무원 발전연구중심을 떠나 2006년 10월부터 2008년 5월까지 1년 7개월 동안 국가통계국장을 맡았다. 2008년 5월에는 또 다른 중국 정부 싱크탱크인 국무원 연구실로 옮겨 일인자인 주임을 맡았다.  

중국 국가통계국 홈페이지 화면 [사진 중국 국가통계국]

그는 국무원 연구실 주임 시절인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원자바오 당시 총리의 연설문 상당수 초안을 잡는 데 참여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원자바오 총리가 양회(해마다 3월 열리는 전국인대, 전국정협 정례회의)기간 중 보고하는 정부업무(중국식 표현으로는 공작)보고 초안 작업도 지휘했다. 국무원 발전연구중심과 국무원 연구실은 고위층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싱크탱크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국무원 연구실은 고위층이 집중적으로 몰려 사는 중난하이(中南海)의 싱크탱크라고 부른다. 국무원 지도부, 그러니까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을 위해 연설문 초안 잡는 것은 물론 주요 정책에 대한 연구와 자문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3년 3월 원자바오 총리가 물러나고 리커창 총리가 취임한 뒤 5년 동안 지냈던 국무원 연구실 주임에서 물러나 허난성 성장으로 부임했다. 59세 나이로 지방에 부임하는 것이어서 대기만성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지난 5월 30일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과학기술 통합대회에 참석했다. 앞줄 왼쪽부터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위정성 정협 주석, 시진핑 국가 주석, 리커창 국무원 총리, 류윈산 중앙서기처 제1서기, 장까오리 국무원 제1부총리. [사진 중앙포토]

3년 동안 허난성 살림살이를 깔끔하게 챙긴 덕분에 2016년 3월, 허난성 서기로 승진했다.  그는 허난성에 부임한 뒤 금융산업 발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성장 시절 해마다 열리는 허난성 금융업무좌담회를 주재했다. 서기로 승진한 다음에도 여전히 금융 좌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금융에 대해 왜 이렇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느냐. 이에 대해 그는 "금융은 국민경제의 핏줄이고, 현대경제의 핵심"이라고 밝히고 있다.  
 
금융이 살아야 모든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2013년 5월말 그는 허난성 성장에 부임한지 두 달 만에 민영경제회의를 주재하면서 서 허난성 금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 차원에서 만든 전국적인 규모의 은행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베이징의 화샤(華夏)은행이나 상하이의 푸둥(浦東)발전은행이나. 광둥성 선전의 선전발전은행과 같은 은행이 허난성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 전체 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9%. 하지만 허난성은 대출이 GDP의 68%에 그쳤다.    

중위안(中原)은행 본사 건물 [사진 am730.com]

 
세푸잔 서기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허난성 서기를 지낸 리창춘(李長春) 서기와 리커창 서기는 각각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벼락 출세했다. 루잔궁(盧展工) 서기는 국가지도자인 전국정협 부주석으로 승진했다. 반면 그의 전임자인 궈겅마오(郭庚茂) 서기는 65세 정년을 넘기는 바람에 전국인대 농업농촌위원회 부주임위원(우리의 국회 농수산위 부위원장과 비슷함)으로 갔다. 세푸잔 서기는 현재 63세. 다행히 서기를 적어도 2년 이상은 계속할 수 있는 나이다. 후원자인 원자바오 전 총리는 영향력을 잃은 상태지만 운이 따를 경우 전국정협 부주석이나 전국인대 부위원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은 있다.  


글=홍인표 고려대 교수
정리=차이나랩 김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