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견신탁제로 집안 싸움 피하기
해외서 살다 한국에 온 시누이
“엄마 재산만은 지켜야” 화내
억울한 며느리, 은행에 후견신탁
치료·생활비 외 못 쓰게 막는 제도
문제는 시누이였다. 해외에 있다 귀국한 시누이는 오피스텔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쾌해했다. 치매를 앓는 엄마를 돌봐주는 건 고마운 노릇이지만 오빠 내외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엄마의 전 재산인 오피스텔을 팔아버린 것은 잘못된 처사란 생각이 들었다. 평생 자식만 바라보고 살아온 엄마 인생을 생각하면 오피스텔 판 돈은 온전히 엄마의 치료비에만 써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외국에 나가 살다 보니 자주 들여다볼 수도 없는 노릇인데 엄마 재산만이라도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시누이는 오빠 내외에게 “6억원은 엄마를 위해서만 써야 한다. 고생하는 것은 알지만 엄마의 증상이 더 나빠질 테니 욕심을 내서는 안 되는 돈”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김씨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시누이에게 시어머니 돈에 손댈까 의심까지 받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해 잠도 오질 않았다.
서로 낯을 붉히며 다투기도 했던 가족은 결국 오피스텔 판 돈을 고스란히 은행에 맡기기로 했다. 국내 유일의 후견신탁 운용 금융기관인 KEB하나은행에 6억원을 넣었다.
계약자는 김씨의 시어머니 본인으로 했다. 치매 증상이 있지만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덧붙였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은행이 신탁된 돈에서 김씨 시어머니 치매 치료와 간병에 쓰일 돈과 생활비를 지급하게 됐다. 이런 용도 외에는 가족이라도 돈을 인출할 수 없다.
가족은 대신 ‘만약 돈이 남으면 어머니의 뜻에 따라 아들과 딸이 상속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은 “치매 부모를 돌보는 자식들끼리 싸우는 경우가 많다. 특히 주로 간병비 등 돈을 둘러싼 다툼이 가장 많다”고 설명했다.
중앙치매센터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 중 치매 진단을 받은 환자는 지난해 기준 68만 명이다. 2030년에는 127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법원에 접수되는 후견신청 건수도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는 2013년 7월 1일 성년후견제가 도입됐다. 성년후견인 신청은 법원을 통해 할 수 있다. 법원은 배우자 또는 자녀, 친인척, 제3자인 전문후견인 중에서 적합한 후견인을 정한다. 대법원에 따르면 2013년 637건이었던 후견 신청은 지난해 3209건으로 늘어났다.
후견신탁 땐 후견인·친척도 돈 못 찾아
후견신탁은 후견인이 담당하던 재산관리를 전문은행에 맡겨 유용을 막는 제도다. 우리 법원 역시 최근 가족 간 분쟁을 줄이기 위해 후견신탁을 이용하고 있다.
최근 에는 현금성 자산 외에 부동산까지 금융기관에 맡기도록 하는 추세다. 일반 성인은 금융기관과 직접 계약을 해 후견신탁을 할 수 있다. 특정한 목적 외에는 돈이 쓰이지 않도록 설계(특정금융신탁)하면 후견인 또는 친인척이라 하더라도 인출이 불가능하다. 반면 미성년자나 장애·질병 등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떨어진 성인은 후견신탁을 하기 위해선 법정후견인이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