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높일 수 있게 진화한 치타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오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법인데, 환경이 워낙 빠르게, 그것도 다른 방향으로 변하다 보니 치타는 대처할 시간이 없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개체의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능력이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하고, 어제가 아니라 오늘의 환경에 맞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런 제대로 된 능력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생명에게 자연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어제까지 아무리 잘 살아왔더라도 오늘의 환경에 맞는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은 치타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자연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토대로 하기에 속도는 언제나 생사를 가르는 요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치타의 삶에서 보듯 속도는 그 자체로 전부일 수 없다. 나무를 오랫동안 키워 본 사람들은 빨리 자라는 나무는 빨리 죽는다는 걸 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옆 나무를 한참 앞질러 가는 나무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 같지만 세상은 묘하게 공평하다. 그런 속성수는 빨리 자라는 만큼 빨리 사라진다. 반면에 느리게 꾸준히 자라는 소나무나 은행나무는 몇 백년을 산다. 굵고 지속성 있게 산다. 깊이 뿌리를 내려 웬만해서는 끄덕하지 않는다.
속성수는 빨라 자란 만큼 빨리 사라져
하지만 경쟁이라는 상황에 갇히면 속도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는 건 지극히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그래서 이런 세상을 살게 된다.
세상은 지금 “가느다란 전선이 생각의 고속도로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조리 있게 이야기하기보다는 더 빨리 이야기하려고” 하고, “가벼운 읽을거리로 지적능력을 소모시켜 버린다.” “독서를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양서를 읽지 않는다. (…) 대학물을 먹고 이른바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고전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뿐인가? “정신을 위한 자양분은 등한시하면서도 육체를 위한 자양분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유명한 사람과 만났는지, 저녁을 얼마나 높은 사람들과 먹었는지를 내세우는 게 자랑거리”가 되다 보니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신랄하게 지적한 것 같은데 사실 이 한탄은 벌써 172년이나 된 오래된 것이다. 나중에 자연주의 철학자가 된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당시 미국 동부 사람들을 보며 쓴 것이니 말이다. 172년 전인 1845년이면 말할 것도 없는 옛날이다. 당시 이 땅에 있던 조선은 주변 상황을 몰랐고,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엉거주춤 세상에 끌려가고 있었지만 미국 동부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과 물건을 대량으로 이동시켜 주는 철도가 속속 방방곡곡으로 달리면서 멀리 떨어져있던 다른 세상을 가깝게, 더 가깝게 연결하고 있었고, 그 5년 전인 1840년 등장한 전신, 즉 전보는 연결을 거리가 아닌 시간으로, 오랜 기다림을 눈 깜짝할 사이로 만들어 버렸다. 기껏해야 말이 달리던 속도에 익숙해 있던 세상은 철마(鐵馬)의 속도를 따라가기 바빴고, 전보의 속도로 달려야 했다.
전에 없던 연결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면서 삶의 속도가 급격하게 가속되고 있었다. 가끔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반가웠던 시절은 가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숨차게 뛰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 너도나도 바빠야 했다. 누군가는 신나게 시대의 흐름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갔지만 그러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쳐져야 했다. 빈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괜찮은 집을 하나 마련하려면 부양가족이 없는 노동자라도 10년에서 15년을 모아야 했으며” 다들 그렇게 하다 보니 “집 한 채 마련하느라고 평생 가난에 쪼들리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들떠 있고 신경질적이며 어수선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속도가 전부는 아니다
월든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통나무 집에서의 2년2개월은 자연과 세상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게 했던 시간이었다. 여우들은 생각만큼 영리했고 철새 오리들은 예상 외로 영리했다. 부드럽게 오는 봄은 망치를 든 우레의 신 토르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갖고 있었다. 물론 더 중요한 것도 알게 됐다. 세상에서 한걸음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빠르게 흘러 가는 세상에서 정신 없이 뛰다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길을 잃고 나서야 (…)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그는 세상에서 떨어져 있었음에도 “조그만 책 한 권 말고는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각자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너무 얽혀 살고 있어서 서로의 길을 막기도 하고 서로에게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핵심에서 벗어난, 일시적인 일들만 주요 관심사로 삼는다. (…) 우리의 정신이 교란되는 근본 원인이다.”
그는 근본적인 처방책이 뭔지도 알 수 있었다. “하루를 의도적으로 보내자.” (흘러가는) 물결에 떠내려가지 말고 “율리시스처럼 돛대에 몸을 묶어 (우리를 유혹하는) 세이렌을 외면하면서 그 소용돌이 옆으로 빠져나가자. 만약 (세이렌의) 기적이 울면목이 쉴 때까지 울도록 내버려두자. (…) 그러면 행복감 속에서 삶을 마치게 되리라. (…)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가 할 일을 해나가도록 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대적 전환기가 삶을 어떻게 휩쓸어 가는지, 이런 광풍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저 [월든]에 남겼다. 속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진짜 필요한 속도는 남들처럼 달려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하루하루를 의도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간디와 법정스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삶의 태도다.
손정의, 미국 유학으로 인생 목표 달성할 추진력 얻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고등학교 시절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가 친척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어야 했다. 과로로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형이 고교를 중퇴한 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냉정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는 갔다. “형이 현재의 가족을 책임지면 나는 장래의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또 하나, 사업을 하려면 종자돈도 필요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남다른 속도, 그러니까 미국 유학이라는 속도가 필요했다. 덕분에 그는 필요한 속도를 얻을 수 있었고 지금도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미래로 달려가고 있다.
‘최선’이란 살아가는 속도의 다른 표현이다. 아무데나 최선을 다하는 건 아무 곳으로나 달리는 것과 같다. 힘은 빠지고 숨이 가빠져도 남는 게 없다. 또 다시 달려야 할 곳만 무수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최선이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지려면 방향에서 나온 속도, 방향이 있는 속도여야 한다.
지금 내가, 또는 우리 회사가 다하고 있는 최선은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 또 어디로 향하는 최선인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에, 또 세상이 그렇게 하고 있기에 나도 하는 최선인가, 아니면 나만의 목표에서 나온 최선인가? 치타는 적절한 목표 설정에서 만들어 낸 최고의 속도로 바람의 파이터가 됐지만 바로 그 최고의 속도에 너무 의존하는 바람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가고 있다. 세상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고, 조직 밖으로 나가 조직을 보는 눈이 필요할 때다.
[박스기사] 우리는 왜 바쁠까?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