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올해 추석 연휴는 그야말로 ‘역대급’ 아닌가. 열흘을 쉬는 분도 있다고 들었다. 이쯤 되면 독서가 명절후유증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그 긴 연휴 동안 도대체 뭘 한 거지’라는 자괴감도 막아줄 터. 보람 있고, 기억에 오래 남을 책으로 다섯 권 골랐다. 가족이 같이 읽고 토론해도 좋을 작품들이다. 재미없는 물건은 권하지 않는다.
◆『인생』(위화)
살아간다는 게 뭘까. 연못가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 촌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노인은 부귀영화도 입신양명도, 손자 손녀를 보며 늙어간다는 소박한 꿈도 이루지 못했다. 득도? 예술혼? 자아실현? 그런 것도 없다. 웃고 울고 겁먹고 후회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격동기 중국에 태어나 국공내전과 문화혁명 같은 혼란을 온몸으로 겪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삶은 비루한 건가. 의미가 없는 건가. 소설을 읽다 보면 그런 물음에 고개를 강하게 젓게 된다.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웃음, 울음, 두려움, 후회, 사랑, 용서가 독자의 가슴을 벅차게 한다. ‘노인의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감상이 ‘그렇다면 내 인생도…’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책장을 덮을 때에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씩 안아주고 싶어질 것이다.
무겁고 심오한 주제인데도 마술 같은 글 솜씨 덕분에 너무나 편안하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뉴욕타임스는 위화의 작품에 대해 “서양 독자들이 익숙하게 아는 어떤 유형에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의 원작이기도 하다.
●재미-높음 ●보람-정말 한 인생 산 느낌 ●난이도-적당 ●3~4시간
◆『호모 데우스』(유발 하라리)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뛰어난 저작이다. 개인적으로 『호모 데우스』는 더 뛰어난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피엔스』는 선사시대부터 21세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했다. 『호모 데우스』는 20세기의 사상들을 좀 더 상세히 살피고, 21세기에 벌어지는 현상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지 모르는 일들을 상상한다.
‘호모 데우스(Homo Deus)’라는 신조어는 ‘신이 된 인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인간이 과학의 힘을 통해 영원히 죽지 않고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던 힘을 부리는 신처럼 될 것이라는 얘기냐…. 아니, 이 책은 인간이 그러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할 거라고,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잃을 거라고 주장한다.
어째서?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사상적 기반인 인본주의의 근본 성격과 한계 때문이다. 이 논증 과정이 책의 핵심인데, 정말 흥미진진하면서 동시에 무시무시하다.
●재미-평소 관심 있는 분야라면 몰입도 최상 ●보람-높음 ●난이도-높은 편 ●5~6시간
◆『뉴욕 미스터리』(미국추리소설가협회 엮음)
그래서 짜잔! 월스트리트, 센트럴파크, 할렘, 차이나타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등을 무대로 하는 추리소설집이 나왔다. 해외여행을 못 가 아쉽다면 이 책으로나마 기분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보통 이런 기획물을 집어들 때는 수준이 엉망인 작품이 껴 있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는데, 신기하게도 이 책은 그런 구멍이 없다. 작가들끼리 서로 자존심 대결을 벌였던 모양이다.
절반 정도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속이고 질투하고 서로를 공격하는 가족잔혹사가 있는가 하면 믿고 화해하고 끝까지 기다려주는 부모형제 얘기도 있다. 딱 추석용 소설 아닌가. 잔인하거나 선정적인 대목이 없어 어린 자녀에게도 권할 만하다. 미국에서도 재작년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
●재미-높음 ●보람-높은 편 ●난이도-적당 ●3~4시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제임스 M. 케인)
이야기의 재미는 할리우드에서 보장한다.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너무나 자극적이고 통속적인 내용에 전개가 엄청나게 빨라 순식간에 마칠 수 있다. 소설 속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인터넷뉴스 기사의 제목은 아마 이럴 게다. ‘보험금 노리고 남편 살해한 불륜 커플, 자기들끼리 싸우다 그만….’ 복잡한 문장은 하나도 없고, 심지어 길이도 짧다. 민음사판 기준으로, 작품해설과 작가연보를 뺀 본문은 170쪽밖에 안 된다.
그런데 역시 세계명작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덮을 순 없다. 가족이 함께 읽고 감상을 이야기해보자. 주인공들이 미운지, 불쌍한지.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신이 그들의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할 건지. 제목은 무슨 뜻인지.
●재미-막장드라마 뺨침 ●보람-높음 ●난이도-적당 ●빠르면 2시간도 안 걸림
◆『밀레니얼 칠드런』(장은선)
제8회 블루픽션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십대 자녀와 부모가 번갈아 읽으면 더 좋을 책이다. ‘너무 노골적인 비유 아니냐’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야기와 세계관이 탄탄해 십대 주인공이 느끼는 억울함과 분함, 갑갑함에 굉장히 몰입하게 된다. 어린 독자들은 대리만족을 느낄 것이고, 부모들은 잊었던 그 기분을 다시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
●재미-재미있고 의외로 무서움 ●보람-착잡할 수도 ●난이도-낮음 ●2~3시간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김정선)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당신 틀렸다’고 다그치지 않는다는 점. 글 좀 쓴다는 사람도 무릎 칠 대목이 많다. ‘모든 사람이 다 이상한 것처럼 모든 문장이 다 이상하다’는 철학이나, 문장요소 간의 거리를 어떻게 둬야 자연스럽게 읽히는지 그 원리에 대한 설명 등이 그렇다.
매 페이지 줄을 그어가며 꼼꼼히 공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편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도 괜찮다. 소설 형식을 접목해 딱딱하지 않고, 저자의 문장이 정갈해 읽는 맛 자체가 꽤 좋다.
●재미-적당 ●보람-높음 ●난이도-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2~4시간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