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따뜻함으로 승부한다
'남한산성' 박희순 인터뷰
━병자호란 당시 이시백은 55세였다. 혹독한 추위 속에 전투에 임하는 55세 조선 장수의 기분이란 어떤 걸까.
“‘어우, 힘들어’ 아니었을까(웃음). 이번에 이시백의 갑옷과 투구를 철저히 고증해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전부 20㎏쯤 됐다. 너무 무거워 입고 그냥 서 있기도 힘들다. 그런 채로 전투 장면을 찍으려니 살이 쪽쪽 빠졌다.
이 영화의 전투 장면은 어떤 볼거리가 아니라, 처절함 그 자체다. 백성 중에 차출한 오합지졸 군사들을 이끌고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듯 청군과 싸우는 거니까.”
━조선의 운명과 백성의 목숨을 걸고, 최명길이 화친을, 김상헌이 척화를 주장하는 가운데, 이시백은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그만의 신념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화친이든 척화든 결국 왕과 백성을 지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시백에게는 방법이 무엇이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 같다. 엇갈리는 의견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거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양쪽으로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시백처럼 자신의 본분과 임무에 최선을 다할 때 그 조직이 튼튼해지는 거라 생각한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 쪽이다. 당시 세계정세를 봤을 때 청이 흥하고 있는 상황인데, 청에 맞서 백성과 함께 개죽음을 맞기보다는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조 앞에서 날카롭게 맞서는 최명길과 김상헌도 서로의 충정을 높이 산다. 그런 두 인물에게 이시백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친구다.
“최명길과 김상헌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이시백을 존중하는 건, 그가 누구보다 나라를 위하는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의견이 다른 인물들끼리도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참 멋스럽다. 지금 정치인들과는 사뭇 다른, 조선 시대 선비들의 멋이랄까.”
“그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나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대신들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싸우는 모습이, 한심하게 말의 잔치를 벌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말에는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지금 한국 정치의 보수와 진보가 싸우는 것도 어찌 보면 탁상공론 같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나름의 논리와 충정이 담겨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원작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인물들의 충심을 더 진하게 그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게 배우들의 절절한 연기를 통해 훨씬 피부에 와닿게 살아난 느낌이다.”
━의견이 분분한 문제를 두고, 사람 박희순은 보통 어떤 결정을 내리나.
“중도를 지킨다(웃음). 가만 보면, 결국은 목적은 같은데 그 방법을 두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사람들 얘기를 많이 들어 주면서 중심을 지키려 하는 편이다.”
“‘밀정’ 이후 그런 역할이 많이 들어온다. 내가 이병헌 씨와 김윤석 형의 중간인 것 같다. 무슨 얘기냐 하면, 배우로서 내 개성이, 이병헌의 부드러움과 윤석 형의 불같은 카리스마의 중간쯤 자리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좋게 말하면 그 두 가지를 다 가진 거고, 나쁘게 말하면 이쪽에도 저쪽에도 못 끼는 느낌이랄까(웃음).
스스로도 그 중간이 나한테 잘 맞는다고 느낀다.사실 난 남성미가 넘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런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외모나 목소리가 묵직한 편이다 보니, 센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그런 인물을 해석할 때 내가 지닌 따뜻함이 나도 모르게 가미되는 것 같다. 또 그게 다른 훌륭한 배우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나만의 전략이라는 생각도 들고.”
━이 영화에서 그러한 연기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라면.
“대신들의 논쟁에 휘말려 이시백과 그 부관이 전장에서 잘못한 것처럼 몰리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이시백이 부관의 벌을 대신 지겠다고 하는데, 그 말이 먹히지 않아 처형당하는 부관의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 장면을 연기할 때의 느낌이 각별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사극영화인 동시에, 또 한 편의 남자영화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언쟁이 극을 끌어가는데, 그게 반복되는 구조에서 극의 긴장이 효과적으로 고조될까 걱정이 없지 않았다. 영화를 보니, 완전 기우였다. 그 말과 말이 주옥같고, 두 인물의 깊은 철학을 담고 있다. 남자들의 세계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아름다운 시 같은 문장과 철학으로 겨루는 영화, 멋진 정통 사극은 오랜만 아닌가.”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