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부터 집권해온 그는 오는 24일 치러지는 독일 총선에서 4연임에 성공할 것이 확실시된다. 자신의 ‘정치적 양부(養父)’로 16년간 재임한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의 어떤 점에 독일 국민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열광하고 있는 것일까.
24일 독일 총선 최장수 총리 눈앞
다양한 시나리오 저울질해 선택
시행착오 통해서도 끝없이 배워
총리 취임 후 메르켈은 화려한 관저 대신 작은 아파트에서 남편 요아힘 자우어 교수와 줄곧 살고 있다. 집 입구에 경찰관 두 명 정도만 배치돼 관광객들이 지나쳐도 총리의 거주지임을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여전히 스스로 단골 마트에서 장을 봐서 감자 수프와 자두 케이크를 만든다. 총선을 앞두고 지난 17일 어린이 기자단과 만난 메르켈은 취미를 묻자 “정원 가꾸기다. 총선 이후 수확하려고 감자를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결정적 순간 잡아채는 ‘기다림의 승부사’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메르켈은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으로 가 그 곳에서 자랐다. 학창시절 교사는 “메르켈은 영리하고 끈기있는 학생이었다. 옷차림이나 패션, 연애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아홉살 때는 수영시간에 3m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45분이나 서 있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두 달 전부터 챙기는 아이였다. 메르켈은 “미래에 닥칠 일을 따져보고 위험을 계산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메르켈은 열다섯살 때 러시아어 올림피아드에 나가 우승했다.
메르켈은 물리학 박사다. 그는 실험주의자가 아니라 이론 과학자였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세워 위험 요소를 저울질하면서 반응을 예상하고 정보에 입각한 선택을 내린다. 마지막 결과로부터 행동의 방향을 도출해 내는 방식이다. 이런 과학적 사고 방식을 정치에 도입했다.
하지만 메르켈은 마라톤 협상 내내 ‘빚은 스스로 갚아야 한다’는 원칙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 수록 불리한 건 그리스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야 구제금융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던 독일 내 여론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결국 협상에서 메르켈은 승리했다.
메르켈의 실용주의는 반대 세력과의 갈등 화합에 빛을 발휘했다. 중도우파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좌파의 정책을 적절한 시기에 수용한 것이다. 동성 결혼 허용 법안, 징병제 폐지, 양성 평등 정책 등이 그 산물이다.
메르켈은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배우는 역량 때문에 독일 언론으로부터 “학습 기계”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난민 정책이 대표적이다. 2015년 난민들에 의한 강력범죄가 연일 신문을 장식하면서 대규모 난민 수용을 결정한 메르켈은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반 이민 시위와 테러가 겹치면서 지지율이 20%가량 폭락했다. 메르켈은 난민 문제에 명확히 사과한 적은 없지만 입장을 틀었다. 지난해 12월 당 연례회의에서 “2015년 여름 같은 상황은 되풀이 될 수도 없고 되풀이 돼서도 안 된다”고 못박고, 부적격자를 추방시키는 난민 심사과정을 신속히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치적 양부’ 콜 정계 은퇴 요구한 냉정함도
메르켈은 필요하면 냉정한 선택도 주저하지 않는 면모도 지녔다.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킨 콜 전 총리가 비자금 스캔들로 궁지에 몰렸을 때 그의 정계 은퇴를 요구한 것이 그 사례다. “내 스스로 팔에 독사를 올려놓았다”는 콜의 비난을 뒤로 하고, 메르켈은 기민당 당수가 됐고 독일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메르켈의 최대 덕목은 절제와 포용이다. ‘무티(mutti·엄마) 메르켈’로 불리는 이유다. 메르켈은 첫 연정 대상으로 선거에서 경쟁한 사민당을 골랐다. 선거과정에서 대립했던 ‘정치적 앙숙’ 슈뢰더 전 총리가 추진한 ‘어젠다 2010’ 정책을 이어받아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콜은 정계에 막 입문한 메르켈을 “나의 소녀”라고 불렀다. 그 소녀는 이미 ‘엄마’가 됐고, 국제사회는 독일과 유럽을 뛰어넘는 명실상부한 ‘자유 세계의 총리’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