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버스 한 대가 굴비거리에 멈추더니 60~70대로 보이는 남녀 관광객 20여 명이 한 굴비가게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서울에서 왔다"는 이들은 10분도 안 돼 가게를 빠져 나갔다. 하지만 굴비세트를 산 사람은 2명뿐이었다. 굴비 상자를 손에 든 60대 여성은 "근처 (영광 불갑산)상사화축제를 보러 온 김에 14만원짜리 굴비 한 세트를 샀다"고 말했다. 기자가 '선물용이냐'고 묻자 그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 때문에 (굴비 선물하면) 큰일 난다. 집에서 먹을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전남 영광 법성면 굴비거리 가보니
추석 연휴 앞두고도 손님 없어 한산
관광객도 굴비백반만 먹고 굴비 안사
김영란법 여파로 매출은 반토막 줄고
가격 낮추려 재포장하느라 일은 두 배
인건비 아끼려 가족이 매달리는 구조
참조기 어획량 줄어 가격 올라 이중고
영광군, 굴비 살리기 나섰지만 역부족
정치권도 법 적용 완화 등 개정 움직임
'이가네 경성굴비' 가게 안에서는 직원들이 10마리씩 묶인 굴비를 일일이 풀어 5마리씩 다시 포장하고 있었다. 기자가 '장사가 잘 되는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가게 주인 이경률(37)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씨는 "10마리 한 묶음이 7만원이어서 김영란법에 안 걸리게 반으로 쪼개 3만5000원에 팔고 있다"며 "매출은 줄고 일은 두 배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굴비 가격은 크기에 따라 20마리에 1만원부터 10마리에 1백만원까지 다양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5만원짜리 이하 세트가 제일 많이 나간다고 이씨는 덧붙였다. 50여 년 전 부모님이 시작한 굴비가게를 2002년 물려받은 그는 "인건비라도 아끼려고 원래 있던 직원 2명을 내보내고 어머니와 아내 등 식구 4명이 달라붙어 가게를 꾸리고 있다"고 했다.
주문 전화를 받는 '남양굴비' 대표 이광용(46)씨의 목소리엔 생기가 돌았다. 고객의 까다로운 질문에도 이씨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는 "굴비거리에서 뜨내기 손님은 거의 없다. 오랫동안 품질과 서비스를 믿고 거래하는 단골 장사가 대부분이라 주문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선대 때부터 30년 가까이 명맥을 이어온 이씨도 영광굴비의 전성기를 누렸다. 명절 때는 하루 매출만 3000만원이나 돼 계수기로 돈을 세던 호시절이었다고 한다. 이씨는 "굴비가 잡히는 봄과 설·추석 양대 명절 장사로 1년을 먹고 사는데 요즘은 명절에도 하루 매출이 200만~300만원 수준이고 이마저도 일주일이면 끝난다"고 했다.
그는 "예전부터 굴비 매출은 하향세였는데 김영란법 때문에 가속도가 붙은 격"이라며 "그나마 규모 있고 장사가 잘 되는 집은 매출이 20~30% 떨어졌지만 나머지 소규모 영세 업체는 50%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매출이 준 만큼 마진(중간 이윤)도 줄었다. 이씨는 "옛날엔 5만원짜리를 팔면 2만5000~3만원이 남았는데 요즘은 택배비(4000원)를 빼면 1만원도 안 남는다"고 했다. 이러다 보니 손님에게 가격을 깎아주는 에누리나 덤을 끼워주는 서비스도 거의 사라졌다. 그는 "예전엔 단골들에게 병치나 서대 등 다른 마른 반찬도 한 박스씩 줬는데 지금은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
김영란법의 여파는 굴비거리에 있는 다른 건어물 가게에도 미쳤다. '법성포건어물수산물센터' 앞에서 이선만(58)씨가 장어와 서대·농어 등 말린 생선을 자판에 놓고 팔고 있었다. 이씨가 배에서 직거래한 생선들을 직접 포를 뜨고 해풍에 말린 것들이다. 이씨는 "예전엔 굴비 사러 왔다가 다른 건어물도 많이 사갔다"며 "남태평양에서 잡힌 이 장어가 한 마리에 3만원인데 손님들이 김영란법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선뜻 두 마리는 안 사간다"고 말했다.
굴비업계에 따르면 요즘은 참조기 물량이 적고 가격도 올라 '보리굴비'라 불리는 부세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부세는 참조기와 같은 민어과의 바닷물고기다.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크기는 부세가 참조기보다 크다. 부세를 말리는 과정은 굴비와 똑같다고 한다. 부세는 주로 중국에서 수입하지만 영광군에서는 부세 판매량 등을 따로 집계하고 있지는 않다. 영광 굴비거리에서 부세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선 상인마다 엇갈렸지만 "부세가 굴비를 보완하는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는 데엔 이견이 적었다.
강철 영광굴비특품사업단장은 "작년과 올해 법성포에서 제일 큰 굴비가게 2곳이 부도가 났다"며 "아직까진 가게마다 그간 번 돈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며 버티고 있지만 김영란법이 장기간 유지되면 폐업하는 업체가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광군은 올해 115억원을 확보해 2021년까지 '굴비산업 발전 5개년 계획'을 세워 영광굴비 살리기에 나섰다. 참조기·부세 양식 및 종묘 방류사업 확대와 굴비 가공·유통 시설 개선, 해외 수출시장 개척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김준성 영광군수는 "농축수산물에 대한 법 적용 완화 등 정부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현재 김영란법 선물 적용 대상에서 농축수산물을 제외하거나 일부 품목이라도 빼는 방안, 선물 가액 기준(5만원)과 식사 가액 기준(3만원)을 각각 10만원과 5만원으로 올리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앞서 전남도지사 시절 "김영란법의 취지 자체엔 공감하면서도 법령 개정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당시 그는 "정책이 정당화되려면 서민의 피해를 없애야 한다"며 정부에 법령 개정을 건의하기도 했다. 국회에서도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김영란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영광=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