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사무국에선 ‘김 샘(선생님)’이란 소탈한 호칭으로, 아시아 영화인들 사이에선 ‘미스터 킴’‘큰 오빠’로 통했던 그는 바로 5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출장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작고한 故 김지석(1960~2017) 부집행위원장·수석 프로그래머. 1996년 첫 출범부터 22년간 BIFF를 지켜온 유일한 창립멤버이자, 영화제가 부침을 겪은 최근 든든한 구심점이자 ‘멘토’가 됐던 이다. 향년 57세.
황망한 죽음이었던 만큼 그를 향한 슬픔은 넉 달이 지난 지금도 매일 새것처럼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칸 출장길에 나섰던 그 날의 모습 그대로 멈춘 집무실의 시간처럼. 이건 차마 정리하지 못한 그 방에 깃든 기억들과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 사람들의 못다 한 이야기다. 올해 BIFF가 아시아영화에 대한 고인의 애정을 기리는 ‘지석상’과 생전 그가 꿈꿨던 아시아 독립 영화인 네트워크 ‘플랫폼부산’을 선보인 이유도 다르지 않다.
부산=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강경희(STUDIO 706)
일본부터 중국·홍콩·이란 멀게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아시아 담당 프로그래머로서 그는 가보지 않은 나라가 없다. “미스터 킴은 전부 다 봐.” 그를 아는 영화인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그의 작고 후 BIFF를 떠난 김현민 전 아시아 담당 코디네이터가 들려준 얘기다.
“아무리 만듦새가 거친 영화여도 (김지석) 선생님은 다 보세요. 그 영화를 만드는 데 들어간 시간과 노력을 존중하는 마음으로요. 영화에 연계된 시대적·정치적 배경, 감독 개인의 스토리까지 종합적으로 보셨어요. 제가 어떤 영화를 볼지 조언을 구할 때마다 늘 ‘사람을 많이 만나라’고 하셨죠.” 이렇듯 “자기 철학을 갖되,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관객을 가이드하고, 될성부른 신인 작가들의 재능을 꽃피우도록 고민하는 것.” 생전 그가 들려준 프로그래머의 역할이었다.
“마음씨 좋은 작은아빠 같이,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대했다”는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그가 떠난 이후 한동안 사무국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빠져있었다고 김정윤 홍보실장은 말했다. 당혹한 현실을 누구도 쉬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든 게 그대로인 이 방에, 그가 지금도 출근하고 있다고 믿고 싶을 만큼.
외압이 시작된 2014년부터 아시아 담당을 함께한 김영우 프로그래머는 오랜만에 들어선 빈방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선생님!’ 부르면서 문을 열면 ‘왜 또 뭐가 문젠데’ 하고 웃으면서 맞이해주실 것 같은데…. 선생님과 주고받은 텔레그램 문자를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빠부대’라는 비공식 모임이 있다. 말레이시아 최대 미디어그룹 구매 담당 부사장, 베트남 등지에서 활동하는 배급업자 등 아시아의 마음 맞는 영화인이 모인 10년 지기 친구들이다. BIFF가 힘들 때마다 아무 조건 없이 힘을 보태줬다. “BIFF에선 신인 감독이든, 베테랑 제작자든 함께 고민하고 아낌없이 조언합니다. 설사 이번엔 성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공감하며 인연이 됩니다.” 생전 그의 이야기. ‘플랫폼부산’의 정신이다.
“선생님 트레이드마크가 있어요.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 하자마자 느낌표(!)를 쓰면 ‘왔어? 이리 와봐’란 뜻이고, 대화를 마무리할 때 쓰는 느낌표는 ‘알았어’ 이런 말씀이었어요.(웃음) 희소식이 있으면, 기쁜 마음에 공식 발표 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하셨어요. ‘지석패치’라는 농담 반 하소연도 했지만, 홈페이지 관리, 개막식 준비 할 것 없이 영화제 일을 챙겼던 분이었어요. 그래서 올해 보도개요집이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선생님(정관 부산추모공원)께 가서 보여드렸어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김 홍보실장의 나지막한 귀띔.
양지바른 언덕에서 영면에 든 그를 대신해 정상진 엣나인·아트나인 대표는 2020년 달맞이고개에 100석 안 되는 규모의 소극장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싱가포르의 에릭 쿠 감독은 그 꿈의 극장 이야기를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다. ‘지석상’과 ‘플랫폼부산’도 그의 또 다른 꿈들을 이어갈 것이다. 그렇게, 영화제는 계속될 것이다. 영원히 그와 함께.